미디어는 마사지다, 마셜 맥루한・퀜틴 피오리, 김진홍 역, 2001, 커뮤니케이션북스
The Medium is Massage, Marshall Mcluhan, 1967
pp. 8-9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는 미디어의 특성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예컨대 문자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무의식상태에서 흡수되는, 말하자면 삼투작용에 의한 하나의 테크놀로지이다. 단어와 단어의 의미는 어린아이들에게 특정한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소지를 제공한다. 문자나 인쇄 테크놀로지는 특정한 분과과정과 전문화과정, 그리고 일탈과정을 촉진하고 조장해 왔다. 전자 테크놀로지는 통합과 몰입을 촉진하고 조장한다. 미디어의 역할에 관한 지식 없이는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종래의 관찰 훈련방식은 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구시대의 테크놀로지-기계화-에 따른 심리적 반응과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문화적 과도기에 혼란과 좌절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안의 시대'라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일을 어제의 도구-어제의 개념-를 가지고 해결하려는 데서 빚어진 결과에 다름 아니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상황-전자드라마로 표현되는 오늘의 환경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젊은이들은 신화적이면서 깊이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 세대 간에 메우기 어려운 소외감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자정보 미디어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환경으로 말미암아 전쟁과 혁명 및 민중의 봉기가 야기된다.
p. 10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을 보여주는 만화경이다.
p. 14
우리들의 가족
가족의 범위는 확대되었다. 전자미디어, 즉 영화・통신・위성・비행기 미디어로 인한 정보의 세계적 공급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성격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성실하지만 서툰 두 전문가의 손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없게끔 되었다. 이제 전세계가 하나의 현자인 셈이다.
p. 26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확장이다.
pp. 44-45
문자 이전의 사회에서 감각과 사회적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을 감당했던 기관은 귀였다. 즉 '듣는 것은 믿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표음문자가 대두되면서 귀라는 마술적인 세계는 눈이라는 중립적인 세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에게는 하나씩의 귀 대신 하나씩의 눈이 주어진 것이다.
서구의 역사는 전적으로 시각에 의지하는 매개체인 알렙베트alephbet(히브리어의 알파벳)가 전래된 이래 약 3천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알파벳은 그 자체로서는 어의학적 의미가 없는 단편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구슬처럼 한줄로 꿰어야 한다. 문자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모든 환경을 시각적・공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습관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습관이 더욱 부추김을 받게되었다. -특히 공간적・시각적 관점에서는 획일적이며,
계, 속, 적
이고
연-관-적이다.
열, 연속체인 음절
------아래의 문장이 그 좋은 예의 하나가 되겠지만: 이 생활의 조직원리가 된 것이다. "시작하면, 행하여야 한다As we begin, so shall we go." '합리성'과 논리는 상호 관련되고 연속되는 제반 사실과 개념들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 '합리성'은 일관성과 관련성으로 이해된다.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은, "당신의 말은 합리적인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시각적 공간은 일관성있고 연속적이며 서로 관련되어 있다. 서구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인간이란 시각적인 인간이다. 대부분의 의식적인 경험이 거의 '시각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합리적 인간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합리성과 시각성이란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같은 이전의 시각적인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
행동의 분화, 즉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사고습관의 분화, 즉 다시 말해서 '전문화'는 문자의 테크놀로지에 따라서 점차 수직적으로 구획화하는 과정을 반영했다.
p. 44 (그 아래글)
"눈 그것은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우리들은 귀더러 조용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건, 우리의 의지가 어떻든, 우리의 몸은 느끼나니." - 워즈워드
p. 50
그림을 보고 개개인이 느낌을 달리하듯, 인쇄된 책은 새로운 개인주의의 숭배자들을 창출했다. 그럼으로써 사적이며 확고한 관점이 나타나게 되었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계층의 사람들은 (기존질서에서의) 이탈세력이 되거나 휩쓸려들지 않는 세력이 되었다.
p.??
르네상스의 유산.
상실돼 가는 관점 = 나서지 않음.
관망자.
휩쓸려들지 말 것!
르네상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한결같이 감상자들의 경험의 틀과는 무관했다. 하나의 광장은 모든 것을 위해 존재하며, 모든 것은 그 광장 속에서 행해진다.
저전자정보미디어의 동시적 세계는 우리 모두를, 그것도 동시에 몰입시킨다. 그로부터 이탈할 수도 없으며 자기 나름의 겸험의 틀을 가질 수도 없다.
p. 57
그들에게 있어 문자의 출현은 바로 X-레이가 출현한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것을 형상화한다.....
(독일의 저명한 작곡가 칼 오르프Carl Orff는, 자연스러운 감각의 지각이 아직 형식적, 문학적, 시각적 편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미취학 아동 이외에는 그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pp. 68- 69
"환경이란 그저 주어지는 수동적인 포장품이 아니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환경의 법칙, 설득력있는 구조, 그리고 환경의 모든 유형은 그리 쉽게 지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반환경, 혹은 역상황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고나심의 수단을 제공하며, 보다 명백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낡은 환경과 새로운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혼란이 일어난다. 새로운 미디어의 효과를 명쾌하게 이해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모든 현상을 보려하는 우리의 뿌리깊은 습관이다. 가령 우리가 쓰는 '지각작용'이라는 말은 이같은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같은 심리학적 과정은 무의식 중에 인쇄 테크놀로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쇄 테크놀로지의 공중을 창조했으나, 전자 테크놀로지는 대중을 창조했다. 공중은 서로 다른 관점과 고정관념을 지닌 갭별적인 개인들로 구성된다. 그렇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이 사치스러운 태도, 즉 이같은 단편적인 견해를 버리도록 요구한다.
우리시대의 방법론은 어떤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다양한 모델을 사용한다. 즉 발명이라는 테크닉이 19세기의 발견이었듯이, 판단의 유보라는 테크닉은 20세기의 발견인 것이다.
p. 92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서,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우리 환경의 탐색체로서 유우머는 우리의 가장 설득력있는 반환경적 도구의 역할을 감당한다. 유우머는 이론이 아닌 즉각적인 경험으로 다루어지며 종종 지각력의 변화를 유도하는 최상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구시대의 사회에는 점잖은 이야기가 번창했다. 그들은 줄거리를 요구했다. 오늘날의 유우머에는 줄거리, 즉 연속성이 없다. 유우머란 여러 이야기를 압축시킨 하나의 오버레이overlay다.(오버레이는 울퉁불퉁패었거나 갈라진 고속도로 위에 아스팔트를 엎어 포장하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한다-역주)
p. 93
프로페셔널리즘은 환경의 소산이다. 그러나 아마튜어리즘은 반환경적이다. 프로페서널리즘은 개인을 총체적인 환경의 유형으로 흡수한다. 이에 반해 아마튜어리즘은 개인의 총체적 지각과 사회법칙에 대한 비판적 지각의 발전을 도모한다. 아마튜어는 상실을 용납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메셔널리즘에는 분류하고, 전문화시키고, 환경의 규범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동료들의 집단적인 반응이 확립한 규범이 만족스럽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설득력있는 환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전문가'란 제자리에서 계속하는 사람을 말한다.
p. 111
우리는 소리를 자동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귀꺼풀이라는게 없다. 시각적 공간이 획일적이고 서로 관련된 종류의 조직화된 연속체라면 청각의 세계는 동시적인 관계의 세계이다.
p. 113
"알파벳의 발견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망각하는 습관을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억력을 이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써놓은 것을 믿으려 하지 기억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제자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치치 말고 진리와 유사한 것만 가르쳐라. 그들은 저마다 각 방면의 영웅이 될 테지만 배운 것은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체할 테지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페드르」
p. 117
인쇄된 문자세계의 암시부호-(과거의 유물)-는 페이지의 시각적 체제에 청각적 차원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즉 정보와 리듬, 억양과 휴지부의 효과가 그렇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효과는 상당히 높았었다. -활자면이 여러가지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문의 레이아웃은 일반 도서에 비해 인쇄술로부터 훨씬 다양한 청각적 효과를 제공하고 있다.
p. 118
지문과 마찬가지로 전자장치에 수록된 목소리 문양voice-prints도 어떤 법정에서는 증거로 채택된다.
p. 125
텔레비전의 위력을 가장 분명하게 증명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때였다. 텔레비전은 조문객들과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의식에 참여하게 했다. 텔레비전은 의식의 과정에 전세계인을 끌어들였다. (거기에 비하면 신문,영화,라디오는 소비자들을 위한 들러리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지가 시청자 쪽으로 투사된다. 당신은 스크린이다. 이미지는 당신을 둘러싼다. 당신은 소멸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본질, 동양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역원근법을 창조한다.
p. 153?
"아래쪽 포말을 향하는 몇몇 소용돌이의 하강속도를 비교하면서 위안을 느꼈던 것으로 보아 나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기 상황의 합리적인 분리로 얻은 위안 속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용돌이를 향한 하강」에 나오는 선원은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이해함으로써 공포를 극복했다. 그의 통찰은 우리가 처한 곤경, 우리의 전자체계에 의해 형성된 소용돌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제공해 준다.
*미디어이론에서 Media와 Medium은 분명 차이가 있다. Media가 단수형라면 Medium은 복수형으로, Media를 미디어로 주로 원어를 살려서 번역하고, Medium은 매체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번역은 언제가 눈치게임과 같이 그 시작이 중요한데, 맥루한의 본 저서는 Medium이 미디어로 번역되어서 다른 미디어이론서와의 차이에 대해서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가 사진과 텍스트의 결합이라면, 이것은 북디자인과 텍스트의 결합.
원문도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A.N. 화이트헤드, 『사상의 모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