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더하기 25: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2012, 또하나의문화
p.9
사당동 달동네에서
여덟 살, 열한 살, 열네 살이었던 금선 할머니의 손주들은
이제 서른셋, 서른여섯, 서른아홉 살이다.
이 가족을 따라다니면서
한편으로 이야기꾼 사회학자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밑으로부터 사회학 하기에 빠져들었다.
이제 나는
한때의 도시빈민이
25년이 지난 뒤
빈곤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p.53
조교들이 부부 위장 간첩으로 불려 갔다 온 사건은 한편으로 매우 황당한 경험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연구자의 구술 생애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불려 가면 진술서라는 것을 쓰는데 일종의 자기 생애사를 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생애 단계를 세세하게 쓸 것을 요구받았다. 신고가 들어가면 세 번 정도 같은 자술서를 쓰게 되는데 "어느 국민학교를 나왔고 어떤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어떤 동네에서 어떤 동네로 이사했는지" 등등의 자기 생의 전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떄 자기의 기억에 의존해 무언가를 구술하거나 기술할 때 거짓일 경우, 세 번 정도 되풀이하면 뭔가 착오점이 드러난다는 데 착안한 방식인 듯했다. 그 자술서에서 세부 항목에 착오가 나타나거나 하면 거짓 진술로 지목받는 것이다. 구술 생애사를 녹취하고 있던 연구자로서는 조사원이 불려간 것에 흥분했지만 자술서 쓰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 거리였다.
p. 75
조교들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세입자들은 "부모님께 잘 말해서" 딱지를 사면 틀림없다는 말을 거듭했다. 자기들이야 자금이 없어서 할 수 없지만 그만한 돈쯤은 융통할 수 있을 것 같은 대학원생 부모들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왜 마다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p. 76
문화기술지란 자기의 연구 주제(예를 들면 가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주제의 사람들(즉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뭔가 배워 가는 것'이라는 기본을 때로 잊어버리거나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p. 78
문화기술지 작업을 하는 연구자의 연구 조교이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조교의 인터뷰 녹취록을 풀 때 이 조교가 너무나 문제 해결에 몰두한 나머지 '폭력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짧은 시간에 대답을 언어 내려는 노력을 읽을 때가 있다.
p. 98
어떻게 '사생활'을 드러내는 일을 쉽게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다큐 상영회에서 가장 자주 제기된 질문인데 이는 '사생활'의 중산층적 시각의 편향성을 실감하게 했다. 중산층에게는 내밀한 '사생활'이 이들에게는 이웃이 다 아는 일상사인 것이다.
p. 114
주거의 조건과 거주의 공간
p. 115
이 지역 주민들에게 주거 공간은 곧 지출을 극소화하는 생계 전략의 대상이자 수입을 늘리는 수단이었다. 가옥의 대지는 분양 당시 가구당 10평씩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옆집 대지를 사들여서 넓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 10평인데 이 10평에 대부분 방이 세 개 이상 들어앉아 있고 2층으로 올린 경우에는 방이 더 많았다. 자가인 집주인들에게 방을 들어앉히는 것은 곧 수입을 뜻했다.....
이 지역 주거 공간은 물론 협소하기도 하지만 공간의 분화나 분리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게 가장 눈에 띄었다. 좁은 방은 주거 공간이자 작업장이었다. 이 지역 여성 대부분은 파출부, 가내 부업, 행상 등을 하는데, 가내 부업으로 미싱을 하는 경우 큰 재봉틀이 방 한가운데를 차지해 조그만 방이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작업장으로 보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 출입구를 겸한 부엌에는 수도와 하수구가 같이 있고 부업이나 행상을 하는 집은 부엌이 창고도 겸했다.
이곳에서는 공간이 곧 돈이어서 주거비 지출을 극소화하는 것이 수입을 극대화하는 방식보다 앞서는 생계 전략이 된다. 자가 소유자뿐 아니라 전 세입자도 사용 공간을 주여 수입을 늘린다....
p. 167
자기네는 "싸움도 가난 때문"이라고 했다.
p. 272
전세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셋방에서 보증금 1,000만 원에 우러세 20만 원짜리로 이사하면서 방의 위치도 지하 셋방에서 반지하 셋방으로 승격했다.
p. 273
...목돈 200만 원이 굴러들어 온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들에게는 이러한 종잣돈이 될 수 있는 목돈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잣돈을 만드는 방법이 사당동 때는 화투짝과 노름이었다면 이제는 복권이 된 것이다. 화투나 윳놀이나 카드놀이 등의 돈내기가 팀이 있어야 한다면 로또는 혼자 하면 되는 것이다. '내기'(배팅)도 개인화된 셈이다. 이 점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셈이다.
p. 284
성공담을 들을 줄 알았는데 20여 년 전 사당동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순서만 바꿔 다시 듣는 듯했다.
p. 302
로맨스 각본을 마지막 보루처럼 안고 있다.
p. 303
쑥쑥 뻗은 아파트 숲에 싸여 있어 사당동 달동네와 전연 모습이 다른데도 임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25년 전 사당동의 어떤 풍경과 겹쳐지고는 한다. 방의 크기는 분명 커졌고 시설도 큰 격차가 나지만 방 안의 냄새는 비슷하다. 아니 삶의 냄새는 비슷하다.
분당에서 전형적인 중산층 삶을 사는 조교는 은주 씨 집을 처음 같이 갔을 때 가난의 냄새가 이토록 지독한 것인지 몰랐다면서 '혼났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 조교는 자기도 어릴 적에 가난을 경험해서 이 가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처음 방문했을 때의 가난의 냄새만은 이 가족을 안지 3년째인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머리가 깨지게 아프고 30분만 더 그 방에 있었으면 거의 토할 뻔했다면서 "오랫동안 이 집을 다닌 선생님이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는 말까지 거침없이 했다.
pp. 313-314
이들의 가난은 세계화나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같은 구조적 요인과 동떨어진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바로 그러한 구조적 요인의 직접적인 충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 충격 속에서 그들이 살 아내는 방식, 곧 삶의 양식이 빈곤 문화라고 이름 붙여진다. 그리고 그러한 빈곤 문화의 핵심에 그들의 성과 사랑과 결혼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들이 그나마 스스로 선택했고 또 선택할 수 있다고 믿게하는 영역이다. 특히 대중 매체가 대량으로 유포하는 로맨스 각본은 이들이 손쉽게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각본이기도 하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성적 문란'이나 가출, 이혼, 동거와 출산 등이 '가족의 위기'로 읽히고 빈곤을 재생산하는 빈곤 문화의 핵심 요소로 주목된다.
가진 것이라곤 맨몸뿐인 이들에게 더는 기댈 곳이 없어졌을 때 그리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을 때 잦은 가정 폭력이나 알코올 중독은 또 다른 빈곤문화라 불리는 삶의 양식이다. 할머니 가족의 경우 손자녀 세대에 와서 이러한 빈곤 문화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빈곤 문화가 이들 가족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빈곤함이 그리고 빈곤의 재생산 구조가 이들 삶의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가난의 조건에 대한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들 가족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체현하고 있다.
*수디르 벤카테시 (2009) 괴짜 사회학, 김영선 역, 김영사
*포화점point of saturation이란 질적 연구에서 수집되는 자료의 내용이 반복되어 자료를 더 추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수집된 자료에 대한 해석이 확정되는 시점을 말한다.
*가난의 반복에 대해서, 더 나아가 계층의 반복에 대해서.
*홍경선, 조혜란
-임대 아파트를 방문했던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것의 냄새를 생각해내려 했지만, 그 모습조차 가물가물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 눈길을 끌었던 몇가지 개인의 에피소드는 차마 적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미시사가 어떻게 거시사를 보여주는가에 대해서.
작은 돌멩이로 수면 위에 물결을 일어내게 하는.
-봉준호 감독이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