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게임: 그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박해천, 2013, 휴머니스트
p.25
그런데 얼마 후 그것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눈치 챈다. 서로 닮은 "상하좌우의 방들"에서 비슷한 표정의 주부들이 비슷한 형편의 살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p.46
이를테면 공지영의 <고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을 보자...아이들이 자라자 그녀는 그저 '주어' 없이 현상 유지의 삶을 살고 있다.
p.63-64
1990년대 초반 신도시 건설로 인해 일산에서 쫓겨났던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가 인생의 모든 피로가 엉겨붙은 69세 노인으로 바뀐 채 등산용 배낭을 메고 서울 숭례문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는 기대에 못미쳤던 토지 보상금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으니 언젠가는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다. 뒤늦게 찾아온 기회. 그는 2층 누각 바닥에 시너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고, 숭례문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 남긴 채 불타버렸다.
...숭례문 방화, 용산 재개발 화재 참사,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첫번째 사건은 '중산층의 성장 신화'가 점차 희미해져가던 시대, 그 신화에서 희생양 역할을 억지로 떠맡아야 했던 이가 귀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비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 사건들은 스스로 아파트가 되지 못했던, 그리하여 그저 견디고만 있던 아버지들이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며 중산층의 무의식 깊숙이 몰락의 공포를 각인시킨 외상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p.138
그해 6월 내낸 계속된 민주화 시위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6년 전 방문했던 선배들의 집을 떠올리며 하숙집에 틀어박혀 책을 펼쳤다. 광장에 나서기에 나는 너무 가난했다. 부채의식에 시달리는 방관자야말로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이었다.
p.154-155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결혼 생활이 변곡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처음으로 되돌리거나 함께한 세월을 무효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오래 함께 살아왔다는 걸. 결국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아이. 그리고 어김없이 흐르는 시간의 힘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열정은 몇 번의 좌절을 맛본 후 이내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로 향했다. 아이가 말을 배워 아내와 대화라는 걸 나눌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그 무렵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거실 바닥에 흩어진 레고 블록들이나 변신하다 만 로봇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다. 나는 적어도, 행복했다.
p. 175
나는 삼청동, 이태원, 홍대 앞 일대를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입지가 좋은 상가 건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구도심의 대상 지역을 거닐다가 묘한 기분에 빠져들기도 했다. 마치 식민지 도시에 관광차 들러 그곳의 번화가를 천천히 둘러보는 제국 출신 산보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p. 213
일반적으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은 자료 그 자체에 대한 물신적 소유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종종 그 자료가 구성해낼 수 있는 정보의 자기 완결적 체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변곡점에서 양질 전환의 촉매로 등장한 것이 바로 패턴 알고리즘이었다. 여기에서 패턴 알고리즘이란 소년들이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들에 대한 호불호의 판단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습득하는 차이의 '식별 규칙'을 의미했다. 이런 규칙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취향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신세대 일부는 처음에는 '자아의 분열'로, 그 다음에는 '메타 자아의 구성'으로 두 번에 걸친 이중구속의 상황을 돌파한 소년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험을 해본 영민한 소년일수록 자기만의 패턴을 체계화하는 데 익숙했고, 자기만의 쾌락을 추출하는 데도 능수능란했다.
p. 232
고급문화론에 경도되었던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어떤 곤궁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전자의 경우 자신이 수호하고자 하는 고급문화라는 대상의 부재에서 결핍을 느껴야먄 했다면, 후자의 경우 대중문화의 한국적 상황에 대처할 만한 비평적 전략의 부재에서 결핍을 감내해야만 했다. 결국 그 결핍에 무릎 꿇었기 때문이었을까? 후자에 속하는 이들 상당수는 자신이 '공부'한 서구 메타 이론의 프로토콜(protocol)에 기반해 해석의 오토마톤(automaton) 혹은 비평의 오퍼레이터(operator)가 되고자 했다.
p. 269
...고시원과 벌집은 근본적으로 똑같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바로 '일실 병렬형의 집단 주거 모델'이라는 공간 구획의 유전자였지요.
p.273
그들은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가맹점으로 개업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실제로 거래되는 대상이 '집'의 특정 기능을 외부화한 공간이라는 점 등이었습니다....커피를 미끼 상품으로 내걸고 일정 시간 동안 공간을 빌려주는 업종, 즉 초단기 부동산 입대업에 가까웠습니다. 앞서 설명해드린 바 있는 집의 기능을 외부화한 방들의 흐름이 노래방과 피시방, 찜질방과 대실용 모텔방 등을 경유해 마침내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과 카페에 당도했다고나 할까요?
p.282
혹시 1970,1980년대 벌집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있나요? 앞서 말씀드린 Y씨와 유사한 처지인 큐브 거주자 S씨는 몇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날 시내에서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함께 지낼 모텔 방을 구하지 못해 종로에서 시청으로, 서울역에서 영등포로, 그리고 다시 신길동을 지나 구로공단 근처까지 흘러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도한 곳은 쇠락한 가리봉동 주택가의 어느 여인숙이었습니다......'큐브의 살아 있는 역사 박물관'이라고 할 만한 곳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그녀는 벌집의 존재 자체도 모를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만일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큐브의 역사 유적 체험이 연인 간의 하룻밤보다 더 뜻깊고 알찬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 예. 물론 농담입니다.
p. 285
시간의 격량에 맞서는 인간방파제
* 영화 <악어>
* 김영하 "인물분석; 귀족주의자 K". <오늘예감>, 통권 5호(1996, 봄)
*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고인다>>, 81-114
**마지막 장은 조금 소름이 돋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