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환대의 불가능성과 윤리, 김장언, 건축신문, 정림건축문화재단, 2015.7.
- 절대적 환대는 늘 우리는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자크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방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방문할지 모르며, 그 방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모른다. 늦은 밤 초인종이 울리면 느끼는 공포는 바로 그 벨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떄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방문의 환대가 아니라 초대의 환대를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주인은 이방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영토와 규칙을 유지한다. 그래서 초대의 환대에서 타자는 결코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공간을 박탈당하고 언어라는 의미를 생성시킬 수 없다.
- 건축가 위진복 2012 <영등포 컨테이너> 노숙자의 임시숙소.
-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이 타자의 윤리에서 출발하는 까닭에 그것은 초월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구도자와 같은 절대적 타자에 대한 언어는 종교적이기 까지 하지만, 그것은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경험으로 유지되고 현재를 성찰하는 윤리적 태도를 발명하게된다.
- 나에게 현대미술은 이러한 환대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대 혹은 그 무엇이 표상되고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자 '타인'인 우리의 현재를 본질적으로 질문케하는 어떤 치명적 순간을 발생시키는 그 공간에 흥분했던 것 같다. 그것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부상된 90년대 미술의 움직임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겠지만, 비단 그들의 움직임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체제로서 '사회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사회는 그 위험한 이방인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해주기도 했다.
환대의 공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디자인될 수도, 구현될 수도 없다.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지상세계이거나 혹은 애니메이션 <총몽>의 지렘과 같은 허약한 구조체에 의해서 유지되는 폐쇄적 장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유연하게 우리의 현재에 스며들고, 우리를 관리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예술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장치에 봉사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더 이상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외부의 질문을 거부하지 않는다. 의미의 발생이 예술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한다면, 의미는 경계에서 출현하고 그 경계는 다양한 치명적 질문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절대적 환대, 그것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윤리를 발명하게 한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현대 미술과 같은 글이었다. 바로 앞선 장에서 환대에 대한 아티클이 나오고 바로 위에 이렇게 따뜻하지만 날카롭게, 직접적이지만 은유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비치다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