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공경희 역, 2011, 은행나무
The romantic movement, Alain de Botton, 1994
- 분석이나 해석 따위가 불필요하고, 물을 필요도 없이, 상대가 자연스레 존재하는 상황을.
- 사랑은 그녀가 '당신도 느끼나요? 정말 근사하죠....할 때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고 속삭일 수 있는 사람을 희망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미묘하게 닮았음을 발견한다는 것의 실체다.
- 그 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과거의 흔적들로 미래를 추론하려 해보았다.
-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사랑하는 것일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 '슬퍼서'라거나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없이 그냥 울고 싶었다. 허약해진 기분이 엄습해서, 세상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너질 수 있는 공간을 바랬다. 다시 마음을 수습할 때까지 누군가의 품에 조용히 안기고 싶었다.
- 서커스 묘기에 나선 사람처럼 판에 묶인채 상대방을 믿어버린다.
- 사람을 괴롭히는 글은 명료하게 술술 읽히는 글보다 왠지 그럴듯하고 더 심오하고 더 참되게 받아들여진다. 하이데거나 후설에게 빠진 예민한 독자는 '이 글은 정말 심오하구나.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걸 보면 나보다 똑똑하구나. 이해하기 어렵다면, 틀림없이 이해할 만한 가치가 더 클꺼야' 라고 생각한다. 책을 내던지며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말하지 않고 학구적인 자기 학대는 은유적인 편견을 반영한다. 진실은 얻기 어려운 보물이며,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경박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이다. 진리는 올라야 할 산과 같아서, 위험하고 모호하며 품이 많이 든다. 도서관의 환한 불빛 아래에 학문의 좌우명은 이렇게 쓰여있다. 읽기 힘든 책일수록 더 진리에 가깝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다. 마음이 열려 있고, 명쾌하고 예측 가능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애인보다는 힘들게하는 애인이 더 가치가 있는 것 같다.
- 그녀의 진정한 소망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여지를 찾는 것이었다.
- '내가' 관련된 일들이 층층히 쌓여 있는 중에서 '그녀가 오렌지를 까는 모습'을 집어내다니 한층 가까운 느낌이 들었고, 그럴듯하긴 해도 구체적인 것이 없는 미사여구보다 훨씬 더 마음을 울렸다.
- ...내가 뭘 놓쳤는지 누가 알겠어요. 혹시 그 애가 평생의...."
" 당신이 그를 놓쳐서 다행이에요."
- 앨리스는 두뇌의 능력이라는 것이 실은 본 모습과 무관한 정신의 곡예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관광객 / 여행자
- 상식주의에서는 복잡성이 아니라 과도한 단순함과 순전한 명백함을 바탕으로 '사유 너머'의 영역을 표시한다.
- 둘의 지역성이 충돌하면, 에릭은 더 지역적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곧 자신의 습관을 고수하고, 상대방의 지역성도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ㅈ역성도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임을 부인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일원론적인 우주의 중심에 놓았다.
- 다른 조명, 다른 렌즈, 다른 애인을 통해서,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보다 더 자신답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 그 남자는 그녀의 말을 막지 않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녀에게 말해봤자 쇠귀에 경읽기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 할말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어할 수 있는 것까지 타인이 결정한다는 증거다.
- 마음의 상처는 창피스러운 감정적인 불쾌감 쪽 보다는 행적적인 불쾌감으로 돌려졌다.
- 아무리 후줄근하고 마음 아파도 우리 문화는 우리에게 보답없는 사랑을 친절하게 지켜보라고 가르친다. 직업 세계에서는 실패를 견디기 힘들지만 사회는 정서 생활에서 나오는 슬픔을 존중해준다.
-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공유된 의사소통체계라고 정의되므로 사회에서 벗어난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며, 혼자만의 언어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뭐라고 주장했든 간에 앨리스는 차츰 이런 말이 '혼자만의 언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형태임을 인식해야 했다. 이 언어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이것은 꿀꿀, 딸깍하는 이해 불가능한 소리의 체계가 아니라 의사를 표현할 수가 없는 뒤엉킨 단어들이었다.
- 조지 버나드 쇼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
- 질투심을 경험하려면 아래 두 가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1) 다른 사람에게 간절히 마음을 쓴다는 점
2) (이 것은 자존심이 개입되는 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제는 자신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
그 남자가 질투하지 않는 것이 앨리스로서는 기쁘지 않았다면, 그 까닭은 그가 고집스레 첫번째 항목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두번째 항목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길을 여는데 이바지 했다.
- 대화가 펼쳐지는 어느 지점에서 앨리스는 자신이 가지 않으면 에릭은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감을 잡았을 것이다.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고싶은 그 남자의 욕망은 아주 작고, 분명히 그녀의 욕망보다 약했다. 그 남자는 혼자 있는 것마저 감수할 테지만, 그녀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그래서 노력하는 일은 그녀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배수진을 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거절 당할까봐 노심초사했다.
- 앨리스는 종교적인 사랑의 속성인 굴욕감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 냉소적인 사람은 너무 많이 바라고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을 뜻했다.
-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사랑이다'
- 에릭은 단순히 그를 만나기 전에도 그후에도 존재했던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의 촉매제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사랑은 그 남자와 함께 자리 잡았지만, 그것이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 그녀는 사랑을 희생의 '장'으로 여겼다.
- 그녀가 해변의 모닥불 가에서 노래하는 무리에 낄 수 없었던 것은 이럴 때마다 일종의 뉘른베르크 콤플렉스에 시달리기 때문이었다. 다 같이 즐겁게 합창하는 이들을 보면, '징글벨'을 노래하던 무리가 얼마나 쉽게 '독일이여 영원하라' 합창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느껴지곤했다.
- 이 뜨거운 이별과 화해의 시나리오는 사랑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감당하는 방식이었다. 진짜 드라마가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을 억제하려고 일부러 꾸미는 짓인 셈이었다....결별, 선언이 잦아지자 수지는 그 경험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그래서 두려움을 덜었다. 사랑의 종말이 관계 속으로 통합되었다.
* 2013 다이어리
*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
* 박해천과 비슷하게 소설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런 방식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에게 질문했던 방식과 유사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