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파상력, 김홍중, 2016, 문학동네
프롤로그
p. 9
책의 제목에 사용된 '파상력'이라는 용어는 원래 2007년 발표한 논문 「발터 벤야민의 파상력 연구」에서 처음으로 제안된 개념이다.(김홍중, 2007) 위의 논문에서 나는 '파괴-수집-재구성'으로 이루어진 벤야민의 독특한 방법론을, 상을 파괴하는 힘으로 집약하여 이해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는 용어의 의미를 더 확장시켜, 나 자신이 수행하는 사회학적 작업의 힘이자 윤리이자 자세이자 방법인 무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파상이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을 가리킨다.
p. 10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 변동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들어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또한, 파상의 장소는 과거의 몽상이 파괴되는 곳일 뿐 아니라 아직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미래의 꿈이 태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pp. 10-11
파상력의 반대편에는, 부재하는 대상을 허구적으로 현존시키는 능력인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구성해내고,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간파하는 도식화의 능력이다. 그러나 파상력은 구성이 아니라 파괴의 방향으로,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의 방향으로 활동한다. 상상력의 최고치가 꿈이라면, 파상력은 깨어남, 즉 각성의 순간에 발휘된다. 꿈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몽상세계의 난잡한 이미지들이 깨지고 흩어져 폐허로 부서져내리며 다른 세계(현실)가 열리는 충격을 경험한다. 이 충격은 새로운 인식가능성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꿈에서 깨어나는 체험에 원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파상력은 능동적 '행위력'이라기보다는 수동적 '감수력'에 더 가깝다. 일차적으로 파상력의 주제는 행위자agent가 아니라 겪는자patient이다.
p. 13
밀스가 말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1부 몽상과 각성
1장 미래의 미래
p. 35
귄터 안더스의 묵시록에 의하면, 인류는 1945년 이후 이미 사라짐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사라짐' 속에, 탈존 속에, 우리의 종언 속에 있다. 지금 우리가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은 요행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과거의 어떤 종말론적 신화와도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인간의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희망 그 자체를 파괴하는 종말론은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력의 사용에 내제된 종말은, 흔히 묵시록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유토피아와도 결합되지 못한다(쿠마르, 2011, 오늘날의 묵시, 천년왕국 그리고 유토피아, 종말론, 맬컴불 엮음, 이운경 역, 문학과 지성사).
p. 47
대개의 묵시록이 상정하는 종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지구의 종언이나 생명의 끝)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의 구조적 변화(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은유'하는 것으로 읽혀왔다. 묵시록이 창궐하는 시대는 사회가 불안과 혁명과 혁신과 파괴의 준동으로 끓어오르는 대격변의 시기이다. 이때 세상의 종말은 특정 '체계'의 종말이거나 정치 '레짐'의 종말이거나 한 '시대'의 종말을 대리표상하는 이미지였다. 종말론은 보편적 서사 형식이다(커머드, 1993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 조초희 역, 문학과 지성사)
p. 56
그는 문화사의 근원적 추동력을 파토스와 사유, 감정과 이성의 변증법적 갈등에서 찾았으며 이를 지칭하는 '파토스형식Pathosformel' 개념을 창안한다.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 그는 '그림지도-기억Der Bilderatlas Mnemosyne'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이미지 몽타주를 시도한다....바르부르크의 그림지도는 이처럼 특별한 설명이나 이론적 사변 없이, 이미지 그 자체의 제시를 통해서 이미지의 역사와 기원과 힘을 드러내며, 더 나아가서 집합기억과 이미지의 깊은 연관을 암시한다.
p. 58
잔존은 죽음/부활이 아니다. 죽음이 없기 때문에 부활도 없다. 그것은 어떤 잉여적nach, sur 삶이자 유령적 삶이다. 변형의 삶이다. 잔존은 역사적 단절과 연속성의 메타포를 동시에 부정한다. 그것은 끊어짐으로써 이어지는 삶이다. 단절(망각)되었기 때문에, 그 단절 속에서 다시 회귀하는(회상되는) 삶이다. 그것은 추억souvenir처럼 평온한 과거의 복귀가 아니라 기억mémoire처럼 파국적인 과거의 복귀이다......파토스의 이미지는 죽은 적이 없으며,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되살아난 적도 없다. 다만, 자신의 장소를 바꾸어 영구히 연명했을 뿐이다. 차이를 동반하는 영원한 회귀. 그것이 바로 이미지의 시간과 생명의 형식이다.
p. 62
벤야민, 바르부르크에서 디디-위베르만으로 이어지는 지적 계보에서 어떤 이미지는 정신/육체를 깊이 찌르고 들어가는 전기적 자극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지로 인해 살고 죽을 수 있다.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변증법적 이미지는 불덩어리다. 지평을 태운다. 인식을 태우고 부수고 무너뜨린다. 이미지는 파상한다.
2장 마음의 부서짐
p. 72
나라는 고향, 산천, 풍경, 기억, 역사를 모두 내포하는 지리, 역사, 심성적 총체다. 사랑의 대상은 국토와 풍경을 요청한다. 나라는 사상의 대상이 아니라 총체적인 마음의 지향의 대상이다. '국가 사상'은 가능하지만 '나라사상'은 불가능하다. 사유가 아니라 상상과 희망을 포함한 포괄적 마음의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팽목항에 매달린 실종자 가족의 한 편지에 적혀 있는 "얘들아 넋이라도 혼이라도 절대 이 나라 돌아보지 마라"라는 절규는, 세월호 사건이 야기한 마음의 부서짐의 심도를 가늠케 하는 척이다.
p. 87
...애도와 멜랑콜리는 모두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상실된 대상은 애착(리비도)이 충당되던 "사랑하는 사람", 혹은 그와 심리적 등가를 이루는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이다.(프로이트, 1997:244). 증상의 관점에서 보면 애도와 우울증은 거의 흡사하다(프로이트, 1997: 244-5). 그러나 양자는 리비도의 경제학(욕망의 등가교환)의 맥락에서 차이를 보인다. 애도는 상실된 애정의 대상에 투자되었던 심적 에너지가 포기되고, 새로운 대상에 재투입되는 노동과정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애도를 통해 마음이 부서졌던 자는 삶으로 회귀한다. 이와 달리 멜랑콜리는, 애도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리비도가 새로운 대상을 찾아 투하되지 못한 채, 주체의 심리 내부로 회수되어(자기애적 동일시) 가학적으로 자아에 충당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p. 111
구원은 파토스의 형식에 있다. 예술이 세월호 사건이 남긴 이 캄캄한 무의미를 구원하는 방식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저 참극의 심장으로 걸어들어가 거기서 용감히 부서지되, 그 잔해를 다시 일으켜세워 하나의 조그만 환영(작품)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3장 몽상공간론
p. 131
대다수의 서울 담론들은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 골목길에 대한 '애정'을 토로할 자리를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골목길이라는 장소에 부여되는 이 각별함은 모종의 양가성에 둘러싸여 있다....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란 사실 그 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빈곤한 삶의 환경을 은폐하고 있는 가면이자, 더 나아가서 한국의 폭력적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의 삶의 공간을 미화하는 일종의 베일일 수 있다.
4장 리스크-토템
p. 152
이처럼 합리성/감정, 성/속, 교환가치/숭배가치의 기묘한 복합체를 이루는 아이의 의미론적 이중코드를 나는 '리스크-토템risk-totem'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유괴영화에서 아이는 한편으로 리스크(합리적 관리의 대상)로 정립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뒤르케임이 말하는 토템(숭배 대상)의 의미를 획득하기 떄문이다. 납치된 아이는 리스크이면서 토템이다.
p. 161
"아이라는 문제Kinderfrage"(벡-게른스하임, 2000,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p. 163
한편으로 아이는 리스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이는 재-주술화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 선택과 관리를 요하는 것으로 인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이는 숭배되고 신성시된다. 이와같은 아이의 토템화는 후기 근대사회의 다양한 부문에서 확인된다. 아이는 부모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사로잡혀 있는 가족토템이다(Furedi, 2002, Paranoid Parenting)
5장 사랑과 꿈과 환멸
p. 170
사랑으로 묶인 남녀관계의 실재는, 계급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적대이다. 사랑은 사랑의 파괴와 공진화한다.
p. 173
사랑의 진정성은 사랑의 영원한 자기부정상태의 반복적 강박에 묶인다.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 자신으로 남게 된다는, 이 존재론적 역설이 사랑을 괴담을 만든다. 사랑의 괴담은 그 허망함과 거짓됨이 아니라 사랑에 부과된 진정성의 강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기괴하고 두렵다. 그것은 망각할 수 없는 상처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진정성이 논리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죽음의 형식이 요절이었다면, 사랑의 진정성의 논리적 귀결은 사랑의 자기부정이다.
p. 179
사랑의 소통은 본질적으로 유아적이다. 사랑은 의미의 지속적 유예를 보장하는 텅 빈 발화를 통해서만 소통된다. '엄마, 나 이뻐?' 이 언표의 의미론과 화용론은 고장나있다. 메시지는 미지에서 미지로 연기된다. 아이의 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말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달가능성Mitteilbarkeit"을 전달하기 위해 말해진 것이다(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Suhrkamp Verlag, 1972-1989)
6장 꿈과 사회
p. 200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이론적 테제들은 i) 마음의 작용 중 하나인 '꿈꾸기'를 통해서 행위자들은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가 뿌리내린 세계의 미래를 상상적으로 창조해나간다는 사실, ii) 미래라는 것은 시간의 기계적 흐름 속에서 자동적으로 도래하는 무엇이 아니라, 꿈꾸기를 통해 생산되고 분배되는 재화라는 사실(따라서 꿈은 개인의 소유물인 동시에 사회집단이나 장, 혹은 국가나 문명이 생산하여 제공하는 공공재라는 사실), iii) 이처럼 꿈을 꾸는 능력은 가력 부르디외가 '자본'으로 개념화한, 사회적 행위자의 주요한 추구대상이자 자원이라는 것, 그리하여 꿈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로서 행위자들 사이에 흐르며, 행위자들의 신체와 마음에 축적된다는 사실, iv) 사회변동의 역사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몽상구성체'를 건설해나가는 몽상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꿈들이 새로운 꿈들에 의해 파괴되어 환멸적으로 부서지는 각성사라는 사실로 집약된다.
p. 216
일루지오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개별적 믿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공유된 믿음이다. 문제는 일루지오가 그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자들의 눈에는 하나의 환상illusion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ourdieu, 1994, raisons Pratique)
pp. 230-231
기원사에서 과거는 고정된 불변의 사실들이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과 맺는 성좌구조konstellation에 묶인 만화경적 이미지들의 지평이다. 19세기의 기원사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19세기를 실증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과 전쟁이 파국적으로 몰아닥친 1930년대의 관점에서 지난 세기를 바라볼 때 열리는, 두 시대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다(Gagnebin, 1994, Histoire et narration chez Walter Benjamin, 17-51). 따라서 이 기획에는 상호교차하는 엇갈린 두 가지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투사한 유토피아적 소망의 '전진하는' 시간성이다. 즉 몽상의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이 꿈들이 악몽으로 전환된 현재의 폐허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고적' 시간이다. 이것은 각성의 역시이다. 몽상사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꿈들은 유토피아로 나타난다. 그러나 가성사의 고나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상품물신의 환등상, 진보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집요한 믿음, 영겁회귀에 대한 신화적 절망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는 폐허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벤야민에서 꿈은 환상(신화)와 유토피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최성만, 2014: 350)
p. 235
몽상구성체는 단순히 집합표상이 아니라, 꿈의 에너지와 리얼리티의 물질적 양태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꿈-현실의 혼합물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는 건축물에서 시작하여 신속히 지나가버리는 유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삶의 형상들 속에 그 흔적"을 남기는 유토피아다.
p. 250
우리가 장의 몽환적 성격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은, 장으로부터 존재론적 근거를 박탈당하는 폭력적 순간을 체험할 때분이다(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
2부 생존과 탈존
7장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p. 263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인지되고 체험되는 경쟁상황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21세기 청년들의 세대심이다.
p. 281
시위나 집회, 공연, 학습, 세미나 등의 모임들을 통해서 공존주의자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구체적 실천들이 발생한다. 이들의 중요한 감정적 자원은 분노와 공감이다. 분노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향하며, 공감은 배제된 자나 피해자를 향한다.
p. 282
...가혹한 생존경쟁의 지속되는 압력에 효과적으로 적응하지 못한 채 도태되어가는 행위자들이 체험하는 '마음의 부서짐heartbreak'의 결과물이다. 생존의 꿈이 거부되었을 때, 공존의 현실이 파괴되었을 때, 그리고 독존의 환상이 환멸로 끝났을 때, 탈존의 참혹한 실재가 나타난다. 21세기 청년들의 마음풍경은, 발전과 성장의 신화를 체험했던 부모세대, 민주화의 진보를 체험했던 세대들의 맹목적 낙관주의와는 다른 허무와 비판, 피로와 체념, 꿈과 미래의 상실이라는 공유된 비관주의의 기본 정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p. 291
생존주의란 당혹스런 개념이다. 왜냐하면, 생존은 그 본성상 주의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은 주의 이전, 성찰 이전, 사고 이전의,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로서 생존에의 경향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9장 탈존의 극장
pp. 333-334
바르트에 의하면, '작가écrivain'란 제도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채 언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소유해온 자로서, 말하고 쓰는 행위를 규제하는 기술적, 장인적 규범의 근대적 전문가이다. 그는 세계가 자신에게 던지는 수많은 의문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방법적 고민 속에서 해소시킨다. 말하자면, 그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작가는 세상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바르트에 의하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와 다른 방식으로 글쓰기를 실천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글쟁이écrivnat'다. 자동사적 성격을 갖는 작가와 달리, 글쟁이는 타동사적인 존재, 그리하여 목적어를 갖는 존재다. 글쟁이는 증언하거나, 해명하거나, 가르치려고 쓴다.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자 한다. 글쟁이는 자신들의 문장과 언어를, 작가들이 그렇게 하듯이, 강박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여 퇴고하고, 미화하고, 정련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언어는 비판의 도구이며, 위중한 상황에 개입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들에게 쓴다는 것은 세파의 흐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p. 337
목격자에게 언어는 순수한 도구, 자신의 단단하고 명확한 도구성만을 갖고 있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목격자는 언어를 사유하지 않고 언어에 매달리거나 언어와 유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한다.
p. 355
비참하게도 그것은 저렇게 그냥 사라지는 것, 탈존이었다. 아이는 세계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처참함을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써, 이 세계에 태어나기를, 여기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여기에서 사는 우리 모두를, '여기'를 만든 자들에게 가장 고틍스런 진실을 드러낸다. 당신들이 실패했다고. 당신들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고. 사람이기를 원하는 자들은 사라짐을 선택한다고, 사라짐으로써 사람으로 남겠다고.
10장 진정성의 수행과 창조적 자아애의 꿈
p. 377
...합평회라는 의사소통공간은 시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를 즐기는 낭만적 자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치밀한 분석과 해석, 그리고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차별적 시적 자본을 가진 행위자들의 경연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합평회는 이처럼 관계의 수평성과 위계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p. 387
...구성원들의 소속감의 정도,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비전, 공동체의 활동에 대한 전념commitment의 강도가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공동체에 속하려는 욕망과 희망이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심적 논리의 하나를 이루어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3부 사회의 마음
11장 소명으로서의 분열
pp. 420-421
현장에 푹 빠지면, 풍경은 허위로 비추어진다. 소박한 경험주의는 자료 물신주의나 현장 실재론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위험을 내포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풍경은 이 세상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풍경 쪽으로 깊숙이 드러온 자는 현장에 갈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다. 풍경은 현장으로부터 질서와 구성의 원리를 부여받기보다는 오히려 질서와 구성의 불가능성에 의해 협박을 받기 때문이다. 현장에 가면, 풍경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있는 것은 해독되거나 정돈되지 못한, 수많은 의문들과 오류들로 구성된 거대한 자료와 감각 데이터의 더미일 뿐이다. 좋은 풍경은, 풍요로운 풍경은 그리하여 현장을 외면하는 연구자에 의해서도 생산될 수 있다. 빈곤이라는 리얼리티 그 자체와 거기에서 방출되는 날것의 데이터가 내포하는 '사실성'에 비추어보면, 빈곤에 대한 연구와 그 결과를 작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잉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현장과 풍경의 변증법은 깨진다. <사당동>은 이같은 아이러니를 가로지른다.
12장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p. 467
소셜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 약회된 세계에 나타난, 사회적인 것의 대리보충이다. 로베르 카스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소셜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 없는 세계에서 사회적인 것le social dans le monde sans social"의 역할을 대리하는 것이다(Robert Castel, 1981, la gestion des risques)
p. 496-497
상호작용 의례interaction ritual에서 감정적 조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연대감이 산출된다. 상호작용 의례의 성분이 되는 감정은 일시적이지만 그 산출물은 오래 지속되는 정서이며 그 자시를 함께한 집단에 대한 애착의 감정이다. 그래서 장례식의 단기적 감정은 슬픔이지만 장례식의 의례를 행한 결과는 집단 유대의 생산(또는 회복)이다. 파티의 감정적 성분은 친밀감이나 유머겠지만 장기적 결과는 신분 집단의 성원으로 느끼는 소속감이다. 나는 이 장기적 산출물을 감정적 에너지라고 부른다....(콜린스, 사회적 삶의 에너지, 2009: 161)
-사랑합니다....이 책 너모 좋아요....
*나가이 다카시 [나가사키의 종]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권터 안더스 [인간의 구식성] 1956
보드리야르 1978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
리오타르 1979 [포스트모던적 조건]
프로이트 1997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
Alain Badiou, 2005, Le siècle, Paris, Seuil
레나토 로살도 박사 일롱고트 부족의 구성원들이 머리사냥을 하는 이유를 그들에게 직접 물어본다.
'담론 구성체formation discursive' (Foucault, 1969, L'archeologie du savoir)
벅-모스, 2004,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가브리엘 타르드 [모방의 법칙]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자크 오몽 해체된 얼굴 "혹은 탈-얼굴de-visage"
오타 요코 [시체들의 도시]
한나 아렌트 책들.....[인간의 조건]
김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에바 일루즈
콜린스 [감정사회학]
*<사회학은 전투 스포츠다la sociologie est un sport de combat>2001
*Piggy-backing
*사몽, 공몽, 공몽, (김홍중 2015년 논문 찾아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