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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귀환, 핼 포스터,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역, 2012, 경성대학교 출판부

실재의 귀환, 핼 포스터, 이영욱, 조주연, 최연희 역, 2012, 경성대학교 출판부

The Return of the Real, Hal Foster, 1996

 

 

 

 

 

 

누가 네오-아방가르드를 두려워하는가

pp. 55-56

오히려 주체성은 외상적 사건들에 대한 예상과 재구성의 이어달리기로서 구조화된다. "무언가가 하나의 외상이 되려면 항상 두 개의 외상이 있어야 한다"고 장 라플랑슈Jean Laplanche는 말하는데, 그는 프로이트 사상 속의 상이한 시간 모델들을 명확히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했던 인물이다. 어떤 사건은 오로지 그 사건을 다시 약호화하는 다른 사건을 통해서만 등재되며, 또한 우리는 오로지 지연된 작용 속에서만(사후성Nachträglichkeit)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20세기말이라는 시점에서 모더니즘 연구의 목록들 속에 집어넣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유추다. 즉, 주체성의 경우 유사하게,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도 미리-당김protension과 다시-당김retension의 지속적인 과정, 예상된 미래들과 재구성된 과거들 간의 복잡한 이어달리기로서 구성된다는것-간단히 말해,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는 지연된 작용 속에서 구성되며, 이 지연된 작용은 이전과 이후, 원인과 결과, 기원과 반복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모조리 뒤엎어버린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교차점

p. 82

그러나 신표현주의는 외관상 무척 자유롭게 보이지만 실은 레이건-부시 시대의 문화적 퇴행에 관여했던 반면, 미니멀리즘은 외관상 무척 제약이 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새로운 미술 영역, 즉 현재의 선진적인 작업이 계속해서 탐구하고 있는 영역을 열어주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장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점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수용이 우선 적절히 자리를 잡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미니멀리즘의 주요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를 통해 기존의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대항 기억counter-memory이 제시되어야 한다.

 

p. 104

그 도로의 경험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은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 경험이 미술의 종말임에 틀림없다고 혼자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대부분의 회화가 무척 회화적으로 보인다. 그 경험의 틀을 씌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것은 단지 경험해볼수밖에 없는 것이다.(Tony Smith in Wagstaff, "Talking with Tony Smith")

 

p. 121

수열성은 물론 미니멀리즘과 팝보다 앞서 나타났다. 사실 이 방식은 미술의 초월적 질서들(신, 본연의 자연, 플라톤적 형태들, 예술적 천재)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이미 미술에 침투했다. 왜냐하면 일단 위와 같은 질서들이 지시대상 혹은 보증물 구실을 못하게 되자, "전 작품이 모두 원적이 [되었고]" 그리고 "각각의 그림은 확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수열 속의 한 불연속항이 [되었으며], 따라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같은 미술사가 제작한 다른 그림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선적으로 읽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Jean Baudrillard, For a Critique of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Sign, trans. Charles Levin (St. Louis: Telos Press, 1981), 104)

....그렇더라도 비로소 수열적 생산이 미술작품의 기술적 생산과 일관된 통합을 이룬 것은 미니멀리즘과 팝에 이르러서다. 

 

 

기호의 수난

p. 131

1960년대의 선진 미술은 서로 상반된 두 명령 사이에 끼어 있었다. 말하자면, 60년대에 미술은, 한편으로는 후기 모더니즘의 지배적 논리가 요구하는 미술의 자율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명령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율적 미술을 깨뜨리고 문화라는 확장된 장, 즉 그 속성상 대체로 텍스적인-여기에서 텍스트ㅡ적이란, 언어가 중요해졌다는(많은 개념미술에서 그렇듯이) 의미에서이며, 또 주체와 대상 모두의 탈중심화decentering가 지배적이게 되었다는(많은 장소-특정적 미술에서 그렇듯이) 의미에서다- 문화의 장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명령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미술 기호의 자율성과 미술 기호의 산포dispersal, 말하자면 미술의 새로운 형식들 그리고/또는 그런 형식들과 대중-문화 형식들과의 조합을 가로지르는 미술 기호의 산포 사이의 이 같은 긴장은 미니멀리즘과 팝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또한 북미 독립영화 작가들(예컨대,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 같은)의 재귀적인 영화reflexive cinema와 프랑스 뉴 웨이브 작가(예를들어,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같은)의 암유적인 영화allusive cinema 사이의 관계도 지배했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 이러한 변증법에서 텍스트라는 항목이 실천과 이론 모두에서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 

 

 

냉소적 이성의 미술

pp. 173-174

이는 회화에 대한 분석적 메타언어의 수사학이지만, 그 결과는 회화의 탈역사적 관례주의, 즉 회화적 실천의 역사성을 배제하는 회화의 기표들에 대한 물신숭배다. 그 무엇보다도, 기표에 대한 이 물신숭배는 관례주의 미술을 우리의 상품-기호의 정체경제에 양도해버리며, 그래서 이 물신숭배는 그러한 정치경제에 대한 비판이기보다 축도가 된다.

     시뮬레이션은 또한 미술의 바깥에서도 가볍게 취급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구체제의 훈육적 감시 및 매체 스펙터클과 더불어, 사건들의 시뮬레이션은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억제 형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이비-사건들에 의해 진짜 사건들이 시뮬레이트 또는 대체되고 있는 때에, 그 진짜 사건들에 개입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이러한 구성물-푸코의 감시,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 그리고 보드리야르의 시뮬레이션-간의 관계는 그 자체로 까다로운 주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뮬라크라 이미지들은 이데올로기적 재현들을 증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장 보드리야르가 썼듯이, "이데올로기는 오직 기호에 의한 현실의 호도와 상응할 뿐이지만, 시뮬레이션은 기호에 의한 현실의 단락short-circuit과 현실의 이중화reduplication에 상응한다.(Jean Baudrillard, "The Precession of the Simulacra" Art&Text 11 (september 1983), 8) 

 

p. 177

상품조각

시뮬레이션 회화와 나란히 제프 쿤스Jeff Koons, 하임 스타인바흐Haim Stienbach 같은 작가들과 결부된 일군의 조각이 출현했다. 이 상품 조각 역시 차용미술에서 발전되어 나왔는데, 이 또한 그 자신의 전통, 즉 레디메이트로부터 아이러니한 거리를 두었다. 시뮬레이션 회화가 종종 추상을 레디메이드로 취급했던 것처럼 상품 조각은 종종 레디메이드를 추상으로 취급했고, 시뮬레이션 회화가 미술을 디자인과 키치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것처럼 상품 조각은 디자인과 키치로 미술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활동은 상보적이었으며, 양 집단의 작가들은 이러한 환원들과 역전들을 미술의 종말게임, 그러나 겉으로만 미술의 종말을 내세우는 게임의 묘수들로 즐겼다.

 

p. 187

자본주의적 교환이 등가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것에 상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주요한 방식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식은 다른 원리에 바탕을 둔 교환의 질서, 이를테면 상품 교환의 등가성보다는 선물 교환의 양가성을 참고하는 것이다. 상호 의례로 결속되어 있는 선물 사회에 대한 이 같은 비전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로 부터 상황주의자들과 보드리야르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상품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비판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주장하듯이, 그 다른 질서가 우리의 질서에서도 자주 출몰한다고 해도, 그 것은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방식의 출몰일 뿐이며, 그러므로 저항의 제스처로 그 다른 질서를 불러내는 것은 기껏해야 낭만적인 일일 뿐이다. 두 번째 방식은 내부로부터, 즉 상품-기호들의 재약호화를 통해 우리의 등가성 경제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 전략의 한 측면은 대중문화의 기호들을 차용하는 것인데, 이는 오랫동안 계급, 인종, 성에 대해 주어져 있던 기호들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아온 하위 문화의 양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브리콜라주는 또한 차용미술에서도 실천되지만, 차용미술은 그러한 기호들을 다른 방식으로, 흔히 고급미술의 기호들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다시 위치짓는다. 이 전략의 나머지 다른 측면은 수열적 상품들의 차용인데, 이것이 쿤스나 스타인바흐 같은 이들의 작업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pp. 190-191

...그것들은 내소적 이성cynical reason의 견지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데, 냉소적 이성이란 시뮬레이션 회화와 상품 조각이 발흥했던 1983년에 출간된 장문의 비판에서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가 탐구한 사유의 역설적 구조다. 슬로터다이크에 따르면, 냉소적 이성은 "계몽된 허위의식"이다.(Peter Sloterdijik, Critique of Cynical Reason, trans. Michael Eldre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5) 

 

 

실재의 귀환

pp. 208-209

외상적 리얼리즘

이 외상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식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관한 워홀의 유명한 좌우명, 즉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Swenson, "What is Pop Art?", 26)라는 모토를 꼼꼼이 뜯어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진술은 미술가와 미술 모두의 텅 빔blankness을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말은 텅 빈 주체를 가리킨다기보다 충격을 받은 주체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이 주체는 이러한 충격에 대한 모방적 방어로서,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의 본성을 취한다. 즉, 나도 역시 기계이고, 나도 역시 수열적인 제품-이미지들을 만들어내며(혹은 소비하며), 나도 내가 받은 만큼 좋게(혹은 나쁘게) 준다는 것이다.

 

p. 210

"으스스한 그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다 보면, 그 그림은 실제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된다."(Swenson, "What is Pop Art?, 60.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실질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감정적 영향affect"이라는 말은, 어떤 지시적 경험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정확히 위치지울 수 없는 어떤 경험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반복의 한 기능이며, 최소한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즉, 어떤 외상적 사건을 (행위로, 꿈으로, 이미지들로)반족하는 것은 그 사건을 어떤 심리적 경제인 어떤 상징적 질서에 통합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워홀의 반복은 이런 방식의 복구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외상에 숙달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워홀의 반복은 애도mourning의 대상을 참고 견딘 끝에 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상을 시사하는데, 우울melancholy의 대상에 대한 강방적인 고착이 그것이다. 

 

pp. 219-220

외상적 환영주의

실재에 관한 1964년의 세미나에서 라캉은 반복Wiederholung과 복귀Wiederkehr를 구분한다. 첫 번째 것은 억압된 것을 징후나 기표로서 반복하는 것으로, 이를 라캉은 자동장치라 부르는데, 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암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위에서 논의돈 복귀로, 즉 상징계the symbolic에 저항하는 어떤 것a thing으로서 전혀 기표가 아닌 실재와의 외상적 만남의 복귀다. 그것을 재차 라캉은 투셰라 부른다.

 

pp. 222-223

 

p. 246

혐오 미술에 대한 결정적인 질문이란 외설적인obscene 재현, 즉 관람자를 위해서 대상을 상연하는 장면이 없는without a scene 재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외설적인 것과 음란한 것the pronographic 사이의 한 차이는 아닐까? 즉, 대상이 장면 없이 관람자에게 너무 가깝게 접근하는 것(외설적인 것)과 대상이 관람자를 위해 상연되고 따라서 관람자는 그것을 엿보는 관객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를 얻게 되는 것(음란한 것) 사이의 한 차이는 아닐까?

 

pp. 264-265

만약 적어도 혐오의 제의를 위한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도, 여성도, 유색인도 아니고, 바로 시체the Corpse다. 이 시체는 무관심에까지 떠밀려간 차이의 정치학일 뿐만 아니라 또한 허무에까지 떠밀려간 타자성alterity의 정치학이다.(이러한 무관심을 의무시한다는 것이 곧 문화비평(예를들면 레오 베르사니Leo Bersani의)과 정치 이론(예를 들면 장-뤽-낭시Jean-Luc-Nancy의) 양자에서 모두 탐구된 하나의 가능성이 비공산사회적noncommunitarian 정치학을 기각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지학자로서의 미술가

p. 279

신경증 환자들인 우리도 야만인일 수 있다고 한 프로이트나, 혹은 그러한 타자성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부분이라고 한 바타이유와 래리스 또는 셍고르와 세제르에 의해서 아무리 원시주의적 환상이 재평가되었다 하더라도, 그 환상은 해체되지 않는다. 나아가 원시주의적 환상이 탈접합되지 않는 한, 타자가 무의식과 계속 융합되어 있는 한, 오늘날에도 타자서alterity에 대한 탐구는 새로운 방식, 즉 (아마도 자아 속에 있는 타자성alterity의 요소를 인지함으로써) 차이를 허용하며 심지어 그 진가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낡은 방식, 즉 타자를 여전히 자아를 돋보이게 하는 금박 장식쯤으로 남겨두는 (그 과정에서 이 자아가 아무리 곤란을 겪는다 해도) 방식으로 자아를 "타자화"할 것이다.

 

p. 303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그 모든 통찰에도 불구하고, 해체적-민족지적 접근은 하나의 책략, 즉 미술관 같은 제도를 더 개방적이고 공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밀폐되고 자기도취적인 곳, 그리하여 입문자들에게는 단지 모욕적인 비판성이 상연되는 장소일 뿐인 곳으로 만드는 내부자 게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4장에서 보았듯이, 제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제도 밖에 있다는 해체적 위치설정의 애매함은 또한 냉소적 이성의 표리부동한 이중성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데, 그러한 이중성 속에서 미술가와 제도는 다음과 같이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즉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한 보충물 또는 보상이 되는 식으로 미수르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의 도덕적 순수성을 환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pp. 303-304

"위니테 프로젝트Project Unite" 사례,...

      이것이 준-인류학적 시나리오의 전형이다. 민족지적 참여관찰자의 원리들은 비판되기는커녕 준수되는 일조차도 드물고, 공동체는 단지 제한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프로젝트가 협업으로부터 자기-만들기로, 문화적 권위로서의 미술가를 탈중심화하는 작업으로부터 신-원시주의의 모습으로 타자를 개작하는 작업으로 빗나가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이다. 

 

p. 308

.....상황주의적 파열은 문화적-정치적 프로모션과 화해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제도는,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 제도가 집중 조명을 했을 작업에 오히려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다. 즉 제도가 스펙터클이 되며, 문화 자본을 끌어들이고, 또 관장이나 큐레이터가 스타가 된다. 이것은 음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장소를 재형성하는 것 이상으로 미술가를 전용할 수 있다.....미술가와 공동체는 종종 양자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환원을 통해, 말하자면 공동체의 진정성을 보증하게끔 발동된 미술가의 표면적인 진정성을 통해 연계되는데, 어떤 점에서 이는 새로운 장소-특정적 작업을 간단히 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Roundtable on Site-Specificity"에 나오는 권미원과 르네 그린의 언급을 보라.) 미술가가 특정 장소를 점유한 공동체의 정체성 안에 서게 되면, 그 또는 그녀는 이러한 정체성을 대변하라는, 곧 그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대표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그 미술가는 원시적으로 되었다가 다시 인류학적으로 된다. 결과적으로 제도가 말하는 것은, 여기 여러분의 미술가에 의해 구현된 여러분의 공동체가 지금 전시중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p. 319

혼재 상태palimpsest(본래 씌어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글자를 새로 다시 쓴 양피지를 가리킴-역주)

 

p. 327

각주 11) Foucault, The Order of Things, 387. "언어의 분산이 일어났을 때 인간은 구성되었으므로, 언어가 그 통일성을 다시 획득하면 인간은 분산되지 않을까?"

 

p. 332

그렇다면 1920년대 중반, 즉 국내에서는 반동이, 식민지들에서는 폭동이 일어나던 때, 우파든 좌파든 유럽인들에게 타자의 문제는 올바른 거리correct distance에 관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거리라는 이 애매한 용어(경멸의 기미가 있는)를 나는 문화비평가 카트린느 클레망Catherine Clément에게서 빌려 왔는데, 그녀에 의하면, 라캉이 나치 독일 근처에서 거울 단계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던 바로 그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에서 "거울 단계에 대응하는 민족지" 작업을 했다. 

 

pp. 348-349

일방통행로One-Way Street(1928)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소멸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셋방This Space for Rent"이라는 표지 하에 제공하고 있다.

 

     바보들은 비평의 쇠퇴를 한탄한다. 비평의 시절이 오래 전에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평은 올바른 거리 두기의 문제다. 그 문제는 조망perspective과 예건prospect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그리고 하나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 가능했던 세계에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지금은 사물들이 너무 가까이에서 인간 사회를 압박하고 있다.(Walter Benjamin, Reflections, ed. Peter Demetz, trans. Edmund Jephcott(NY: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85.)

 

이것이 바로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1935-36)에서 개진된 아우라적 거리가 상실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이러한 압박을 광고들과 영화들에서 찾아내기 때문인데, 그에 따르면 광고와 영화는 "성찰이 진행되었던 공간을 폐지해"(앞의책) 버린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포함돼 있는 시각성visuality이다.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벤야민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대립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각적인 것과 촉각적인 것 사이의 대립(알로이스 리글에 의해

후기 로마의 미술 사업The Late Roman Art Industry[1901]과 그 외의 저작들 속에서 개진된)을 빌려온다. 벤야민에게서는 이 두 용어들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즉 일방통행로에서는 촉각적인 것이 비판적 거리를 밀어내는 데 반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는 비판적인 것이 촉각적 충격이라는 견지에서 다시 살아난다(다다와 영화는 모두 "총탄처럼 관객을 때리는" "촉각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와 연관된 거리의 가치에 대해서도, 벤야민은 그에 못지않게 양가적이다. 즉 일방통행로에서는 거리의 상실을 한탄하는 데 반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는 거리의 상실을 환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차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조망과 예견"이 비판적 거리를 보증한다는 생각이다. 

 

 

 

개정판 역자 후기

p. 362

...기존 번역에서 'the Real'은 실재적인 것, 'the Imaginary'는 상상적인 것, 'the Symbolic'은 상징적인 것으로 번역했었는데, 각각 실재, 상상계, 상징계로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방향전환'으로 번역된 'détournement'를 '전용'으로 바꾼다거나 '비탄'으로 번역된 'mourning'을 '애도'로 바꾼다거나 하는 등 변화가 심심치 않았다. 

 

 


 

-쉽지 않는 책입니다...

뷔르거에서 촉발된 그의 '아방가르드'론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할 포스터. 

뷔르거의 아방가르드 이론을 학부 1학년 때(너무나 옛날에) 읽었기에 가물가물 끔뻑끔뻑했다. 

 

-테트리스같은 글의 구조였다. 과거의 이론들이 결합되어서 글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연된 작용. 수열성. 

 

*데리다 '프로이트와 글쓰기 무대FReud and the Scene of Writing 1966'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923

데리다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해체하는 '인문학 담론에서의 구조와 기호, 그리고 유희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Human Sciences' 1966

오웬즈 '대지의 말Earthwords' 1979

오웬즈 '알레고리적 충동The Allegorical Impulse' 1980

Ashely Bickerton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in illumination, 224-25

Benjamin Buchloh, "Allegorical Procedures: Appropriation and Montage in Contemporary Art" Artforum (September 1982)

라캉 "투셰Tuché"

라캉 Being and Nothingness 1943의 사르트르와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1945의 메를로-퐁티에 기대고 있다. 

Bataille, Vision of Excess 

Denis Holler, Mimesis and Castration in 1937", October 31: 11

Walter Benjamin, Reflections, ed. Peter Demetz, trans. Edmund Jephocott (NY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8)

요하네스 파비안Johannes Fabian, 시간과 타자: 인류학은 어떻게 그 대상을 만드는가Time and the Other: How Anthropology Makes Its Object 1983

니체, The Genealogy of Moral, 1887

Joseph Kosuth, "The Artist as Anthropologist" the fox 1 (1975)

Bourdieu, Outline for a Theory of Practice

REPOhistory (도시 풍경을 다시 지도그린다는 개념)

David Harvey, Edward Soja

"분리된 개체"로서의 우리의 위상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볼 것. Gilles Deleuze, "Postscript on the Societies of Control", October 59 (Winter 1992)

1944 계몽의 변증법,

1988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논평들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Duane Hanson, John de Andrea의 인물상, 로버트 고버, Charles Ray, Matthew Barney

Katarina Fritsch, Mike Kelly, Annette Messager

Robert smithson, six stops on a section, 1968

댄 그래이엄, 미국식 가정Homes for America, 1966

마사 로즐러, 3 Works (Halifax: the Press of the Nova Scotia school of art and design, 1981)

인식적 지도그리기와 관련하여 프레드릭 제임스을 보려면 Postmodern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0)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것.

프레드 윌슨, 박물관 채굴하기Mining the Museum, 1992

"Project Unite" 1993, 유니테 다비타이송Unite d'Habitation을 위해 발주된 설치미술

에드가 힙 어브 버즈Edgar Heap of Birds 표지판

 

 

 

 

*편집상의 아쉬운 점은 본문에서 '1장, 2장...' 이런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차례에는 1,2,3 숫자가 안적혀 있어서 계속 위에서 숫자를 세어야만 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