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2015, 문학과 지성사
1장 사람의 개념
p. 43
...군대에서 이런 과정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군인들의 인격을 부정하여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렇게 인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처럼 사용되는 동안에도 국가들-'주권자들'-사이에서는 인격적 관계가 유지된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강화가 불가능할 것이다). 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맹을 맺고, 우의를 다짐하고, 돈을 꿔주거나 갚고, 축구 시합을 하기도 하는 인격체들이다.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pp. 78-79
깨끗한 여성과 더러운 여성의 차이는 노예와 아웃카스트의 차이와 비슷하다. 아웃카스트와 달리 노예는 더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예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노예와 아웃카스트를 비교하면서, 의례적 오염의 관념과 공간적 격리segregation가 전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4장 모욕의 의미
p. 125
낙인을 지닌 개인이 정상인들로부터 존중의 의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처럼 적절하게 처신하는 한에서이다. 낙인자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관용의 한계를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낙인자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관용의 한계를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조건부로 수용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정상인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려 드는 낙인자는 곧 제재에 부딪칠 것이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거나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낙인자들이 받은 대접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프먼은 호텔 미용실에 들어간 맹인의 예를 든다.
p. 127
말하자면 고프먼은 의례의 교환에 참여할 자격이라는 측면에서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시하는 셈이다. 의례의 교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례를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경우, 특정한 행동 노선을 따를 떄만 조건부로 의례 교환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 의례 교환의 장에서 배제되어 '탈인격화'의 과정을 겪는 경우, 여기서 뒤의 두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원권이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pp. 127-128
명성reputation이나 존경respect과 달리, 명예는 순수하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명예는 일종의 위치감각이자 이 감각의 표현이며, 또 그 표현에 주어지는 사회적인 인정이다. 명예를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명예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각주 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Cambridge, MA: Harvard Univ. Press. 1982, p.79 패터슨은 줄리안 핏-리버스Julian Pitt-Rivers의 경구를 인용한다. "명예에 대한 자각이 명예에 대한 요구를 낳고, 명예에 대한 요구가 명예를 불러온다Honer felt becomes honer claimed, and honor claimed becames honor paid.")
p. 141
사회적인 타자화가 유아화infantilization-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쓸 수 있다면-를 동반하는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생활보호 대상자도 곧잘 나이를 무시당하고 아이처럼 취급된다....아이의 이미지는 여기서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더 쉽게 침범될 수 있음을 표시한다. 그들은 더 작은 명예를 지니며, 더 쉽게 모욕당하고, 그려면서 그 모욕의 무게를 평가절하당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 '모자라는' 사람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남들보다 작고 희미하다.
p. 144
사회가 상상적 공동체라면 그 경계는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떄문이다. 같은 이유로 그 사회에서의 성원권 역시 불확정적이다.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pp. 147-148
베버는 시장에서 개인이 갖는 기회를 의미하는 계급 상황class situation과 개인의 명예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 상황status situation을 구분한다. 계급, 즉 동일한 계급 상황에 놓인 개인들의 집합은 공동체적 행동의 토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공동체는 아니다. 반면에 신분 집단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분 집단은 특수한 생활양식, 자기네끼리의 폐쇄적인 교류와 혼맥 형성, 결투를 할 자격과 같은 의례적 특권에 대한 주장 등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의 나머지와 구별하고자 한다. 이러한 계층화는 순전히 관습적이다. 하지만 경제력의 안정적인 배분에 의해 이러한 계층화가 굳어지자 마자 합법적인 특권으로의 길이 쉽게 열린다.
p. 158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 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각주 막스 베버, 막스 베버 선집, 임영일 외 역, 까지, 1991, pp. 131-153)
p. 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이 무넺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p. 165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함되어 나타난다.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5장 우정의 조건
p. 171
모욕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인격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아닌, 온화한 경멸 역시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현대 사회는 동정과 자선을 경계하며,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인격적인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공동체에 관한 두 개의 상상
pp. 197-200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의 조건 또는 한계에 대한 논의들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절대적 환대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벽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혁명의 시간이나 축제의 시간에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공동체의 임재를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공동체를 시적 형태가 아니라 산문적 형태로 현실 속에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빈번히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문도 없고, 문지방도 없으며, '자기만의 방' 따위는 더더구나 없는 그런 공동체에서 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는 사방으로 훤히 열려 있고 투명한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예가 나온다....
대양을 가로질러 신호를 주고 받는 두 마리 고래에 대한 묘사...
이 공동체를 <코스모스>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또 하나의 열린 공동체와 비교해보기로 하자. 바로 거대한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 알렉산드리아이다.....
고래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의 코즈모폴리스를 조직하는 원리는 열린 커뮤니케이션-누구나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려 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범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반면 도서관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혼들은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가능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전체를 감싸는 소리의 궁륭이 아니라, 도처에서 조용히,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교류들이다. 이 교류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혼자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독서와 대화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독서는 또 다른 대화-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pp. 202-203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것이다.
p. 204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6장 절대적 환대
p. 242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7장 신성한 것
pp. 246-247
(이는 발화의 장소성placedness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떄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였다' 등등-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을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p. 255
죽은 사람의 몸 자체는 그 사람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사람'은 몸과 분리되어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온 무언가가, 그 사람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그가 두고 간 이 꺼베딕 속에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간직할 의무가 있는 물건"이다. 우리는 이 물건을 의례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망자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p. 269
모든 희생 담론은 개인이 죽은 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의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성원권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달리 말해서 그의 자리가 공동체 안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무덤, 기념비, 동상, 위패 등은 바로 이 자리를 표시한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자격을 유지한다는 말도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 사람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곧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갖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p. 270
공리주의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우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인구, 즉 숫자라는 관점에서 파악된 인간 개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사람의 관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p. 273
달리 말하면 우리는 살 권리에 대한 토론이 '미끄러운 경사 길'을 따라 굴러내려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 길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던 "신성한 토템들"을 치워버린 탓이다.
부록 장소에 대한 두 개의 메모
장소/자리의 의미
p. 284
세계화의 진전 속에서 우리는 어느 떄보다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globalisation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둥글게 하기'이다. 실로, 세계화와 더불어 지구는 둥글어졌다. 무한한 공간에 대한 상상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졌을 뿐 아니라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마치 벤야민의 글에 나오는 꼽추 난쟁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난쟁이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나의 손실을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년 만에 정원이 조그만 뜰로, 넓은 방이 좁은 방으로, 큰 의자가 작은 의자로 줄어드는 것을. 물건들은 오그라들었다. 마치 거기서 혹이 자라나서 난쟁이 세계의 일부로 화하는 것처럼. 난쟁이는 어디서나 나를 앞질렀다. 나를 앞지르며 내 길을 가로막았다."(발터 벤야민, 꼽추 난쟁이, 발터벤야민-베를린의 유년시절, 박설호 역, 솔출판사, 1992)
p. 285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 있기, 앉아 있기, 아니면 장소를 우너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계산대 위에서 잠을 자는 홈에버 노동자들).......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수없이 입으로 말했을 때 당신은 듣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글씨를 쓴다. 이 글씨를 읽어달라.' 그로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정이기도 한다.
여성과 장소/자리
p. 289
...'갈 데가 없다'는 표현은 그들이 이 사회 안에서 갖고 있는 자리의 위태로움을 드러낸다. 그들의 자리는 심지어 행정 서류상에서도 말소되어 있곤 한다(말소된 주민등록증).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로 되어 있지만, 부당하게도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중이기에, 그들은 가능한 한 스스로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그들을 못 본 체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에 호응한다. 비가시화는 여기서 전략이자 규범이다.
마찬가지로 장소의 점거는 사회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축제와 시위와 집단적 애도의 광경이 서로 닮아 있는 것(군중의 물리적 현전, 행진, 음악, 깃발.....) 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길거리나 광장같이 공적 가시성의 공간이자 사회의 환유이기도 한 장소들을 점거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고 주장하며 우리가 하나의 사회에 속함을, 아니 우리가 바로 사회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서로를 환대하는 (즉 서로에게 자리를 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수행적으로 사회를 있게 하는 것이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최문규 역, 열림원, 2002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1991
어빙 고프먼, 스티그마, 윤선길 정기현 역, 한실대학교출판부, 2009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인간은 죽는다.
고프먼, 수용소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2002
버지니아 울프, 3기니, 태혜숙 역, 중명출판사, 2004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 역, 텍스트, 2013
리처드 세넷,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유강은 역, 문예출판사, 2004
칼세이건, 코스모스, pp. 540-541
루쉰 광인일기, 아Q정전
피터싱어, 동물해방, 김성한 역, 인간사랑, 1999
**서바이벌 로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