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2017, 문학동네
p.간지
우리는 좀더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좀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나빠지지 못했고 밤은 충분히 차갑지 못했으며 말들은 움찔거리며 멈추어 서 있을 뿐이었다.
더 나쁜 쪽으로
p.30
처음 본 순간부터 그와 자고 싶었다. 자는 것만이 그의 진짜를 보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이들었고, 유명하며,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러니 그가 정직해질 수 있는 순간은 그때뿐일 거라고, 그는 아는 방법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렇게 나는 그의 진짜를 봤고, 여러 번 지겹도록, 하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여자애들에게 익숙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지겹다는 말인가?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어? 그는 대답 대신 웃었다. 내가 그를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그의 진짜는 불면과 외로움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밀조차 아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아무런 비밀도 공유하지 못했고 그러니 우리는 연인조차 될 수 없다. 그에게 나는 흔한 여자애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잔짜를 훔쳐내려고 애를 쓴다.
센프란시스코
p. 48
우리는 여전히 시작에 머물고 있다.
카레가 있는 책상
pp.136-137
하지만 전체적으로 괜찮다. 왜냐하면 공동생활을 하고 있기 떄문이다. 자취를 한다면 더 심각해졌을지도 모른다. 치킨집 배달부를 살해하기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벽 너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낮의 귀신들처럼 숨죽이고 있지만, 아무튼 거기 있다. 물론 방안에서 그들도 나처럼 미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한밤중 위층 아래층 옆방 너 나 할 것 없이 이상한 괴성 같은 게 들려올 때도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긴장한다. 긴장한 채로 기다린다. 뭔가 벌어지기를. 그런 순간은 확실히 달콤하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누군가 안도의 기침을 한다. 그러면 그것에 답하듯 또다른 누군가가 기침을 한다. 몇 번의 기침 끝에 마침내, 누군가 문을 열고, 주방의 불이 켜지고, 멀리서 돌아가던 세탁기의 소리가 멈추고, 남은 것은 벽 너머로부터 밀려드는 자동차 소리, 취객의 고성방가, 도시의 소리……
세계의 개
p.182
언젠가부터 기록을 포기했다 그러는 게 맞으니까 어차피 아무의미 없는 것들 영 움직이지 않는 세계 무력한 자에게 인식이란 여기저기 널브러져 이상한 빛을 내는 광기일 뿐이다 그것이 눈앞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악몽이다 의지를 잃어버렸으므로 아주 오래전에 우리가 아니 우리의 세계가 하여 우리는 세곙의 개 남은 것은 시간을 견디는 것 아무 의미도 바닥도 천장도 없는
p.190
인간들이 봄날의 황사같이 무기력하게 쏟아져 있다.
apoetryvendingmachine
p.206
너는 조금 더 고립된다 그것은 네탓이(아니)다
생존자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매우 비어있다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는 멋진 것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세계는 그것을 허용치 않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뭔가를 잃어갔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언젠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생존자들이, 희생자들과 헷갈리기 시작했고 실종자들은 늘어갔다 (물론) 살아남은 자들은 관심밖이다 (문밖에 돌돌 말린 시체들에 대해서도) 서서히 우리는 삶 속에서 절망을 피하는 길은 실종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배운 것을 적용할 삶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나의 선택은 『GQ』 2011년 3월호(부록 『A MAN WITH A SUIT』)에 실린 '박승준씨의 경우'.
모든 힙스터들이 읽길 바라는 글이다.
-'더 나쁜 쪽으로'와 <우리 선희> 사이
-그녀의 책 중에서 BEST는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