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미디어: 바그너에서 가상현실까지, 랜덜 피커, 켄 조던 엮음, 아트센터 나비 학예연구실 역, 2004, Nabi Press
Multimedia: From Wagner to Virtual Reality, Randall Packer, Ken Jordan, 2002, W. W. Norton & Co Inc
딕 히긴스 / 인터미디어 (1966)
p.91
순수 매체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레디 메이드나 발견된 오브제 개념은 인터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터미디어는 예술 매체와 일상 매체 사이를 제시하고 있다.
p.94
해프닝은 콜라주, 음악, 연극 사이의 미지의 땅, 즉 인터미디어로서 태어났다. 이것은 규칙에 지배되지 않으며, 각각의 작품들은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매체와 형식을 결정한다. 그 개념 자체는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때 보다 ‘무엇이 아니다’라고 정의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테드 넬슨 / 컴퓨터 해방/ 꿈의 기계 (1974)
pp.284-285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통해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비-순차적인 글쓰기이다.
일반적인 글쓰기는 두 가지 이유에서 순차적이다. 첫째, 이것은 발화와 발화하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순차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책은 순차적이지 않으면 잘 읽혀지지 않기 떄문이다.
그러나 생각의 구조는 결코 순차적이지 않다. 생각은 모든 지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글을 쓸 때에도, 우리는 늘 사물을 비순차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키려고 한다. 각주는 순서를 벗어난 일탈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다.(비록 윌 쿠피will cuppy와 같은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실험해 보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즉각적으로 이해했던 십여 명의 사람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매우 곤혹스러워 하거나, 마치 내가 자신들에게 매우 기술적인 사실 내지는 무의미한 철학적인 문제를 떠들어대는 것처럼 여겼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평생동안 산문체로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몰랐다는 점을 깨닫고 놀란 프랑스 연극의 어느 주인공처럼) 우리는 계속 하이퍼텍스트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를 알지 못했다.
조지 랜도우, 폴 들레니 /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그리고 문학연구: 예술의 현재 (1991)
pp. 359-360
텍스트가 물리적 매체와 결합되어 있던 기간 동안, 독자와 작가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 즉 텍스트는 선형적(linear)이고, 범위가 제한적이고(bounded), 고정된(fixed) 것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이퍼텍스트는 전통적으로 쓰여진 텍스트의 선형적이고, 제한적이며, 고정된 특징을 뛰어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책이라는 고정적인 형식과는 달리 하이퍼텍스트는 비연속적으로 구성될 수 있고, 읽혀질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텍스트의 블록들(혹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자면 렉시아)로 구성되며, 전자적인 링크로 서로 결합되는 가변적인 구조이다. ... 책과 같이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 전체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는 안정적인 대상을 보는 것과는 달리,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들은 컴퓨터 스크린상에 펼쳐지는 하나의 텍스트 블록의 이미지만을 본다. 그 이미지의 뒤에는 다양한 텍스트의 구조가 놓여 있으며, 이 구조는 독자들이 어떤 링크를 따라갈 것인지를 선택하는 데에 따라서 스크린 위에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다.
p. 362
전통적인 책 한 권에서도 목차, 페이지 번호, 장, 절, 주석, 각주와 색인과 같은 내적인(internal) 하이퍼텍스트 기능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것들은 본래 저자가 만든 것일 수도 있고,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색인, 인쇄 전문가가 덧붙이거나 후대의 학자들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외적인(external) 하이퍼텍스트 기능은 전통적으로 작가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사서나 서지학자가 덧붙인 것이었다. 일단 “텍스트”에 대한 구상이 전집의 형식으로 진행되면, 한정적이고 선형적이고 고정된 방식을 포기해야 하며, 일종의 암묵적인 하이퍼텍스트적 조직화 과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pp. 369-370
이제 독자는 일종의 무작위적인 텍스트들을 만나게 된다. 반대로 작가는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통제력조차 상실한다. 즉 텍스트는 구성요소(렉시아 혹은 텍스트의 블록)로 쪼개지고, 파편화되며 원자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 단위들은 비교적 선형적인 구조 속의 선후관계에 덜 의존하기 때문에, 보다 더 그 자체의 생명력을 얻게 된다.
빌 비올라/ 데이터 공간에도 콘도미니엄이 있을까? (1982)
p.485
만약 사물이 불연속적인 부분이나 요소로서 인식된다면, 그것들은 재배열될 수 있다. 벌어진 틈은 그림자의 공간으로 가장 흥미롭게 되며, 이것은 투영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된다. 기억은 필터(오감이 그러하듯이)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갖추게 된 장치다. 머리 속에 이미지가 끊임없이 재생되어 넘쳐나는 것은 기억술사(mnemonist)가 받은 저주다. ….편집이 없는 인생은 그리 흥미롭지 않은 듯 보인다.
p.498
창조적인 예술가는 반드시 현재 진행중인 기술 발전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p.499
과거의 신성한 미술의 형식, 기능, 미학은 단일한 궁극적 목적 하에 통합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아의 개발이 기술 발전에 선행해야 하며, 그렇지 아무것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유선 TV와 함께 시작된) 데이터 공간에는 콘도미니엄이 있게될 것이다.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사용자에 달려있을 뿐이다. 젓가락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단순한 식사용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로이 애스콧 / 텔레마틱 포옹에도 사랑이 있을까? (1990)
pp.513-514
텔레마틱스는….인간 존재 사이의, 인간의 정신과 인공 지능 및 인공 지각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 기술과 연관되어 있다. 네트워크상의 개별 사용자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글로벌 네트 안에 연루되어 있고, 세계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개인과 상호작용 상태에 있다.
pp. 518-519
서영 현대 미술사에는, 세계를 향한 창으로서 유리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유리 그 자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등장한다. 우리는 <독신자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나 <큰 유리The Large>라고 알려진 그의 작품에서 남자와 여자,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나아가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에너지와 감정을 담고 있는 유리라는 실재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 이 주제는 샤를 포이어Charles Fourier의 의미에서 볼 때 매혹적이고, 아마도 이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Charles Fourier(1772-1837) 1은 우주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2
투명해서 비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큰 유리>는 언제나 자체의 환경과 관찰자를 반영한다. 사랑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끌어 안는 포옹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이성과 확실성은 모두 빠져나간다. 포옹, 즉 글어안음에 참여함으로써 관객은 의미론적 논제의 주인공이 된다. “토대”로서의 거울은 작동-변형-스크린으로, 그리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상호작용과 협상의 장소로 마치 컴퓨터 모니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있다.
p.522
요컨대, 텔레마틱 문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을 각각 따로 떼어내지 않는 것을 의마한다. 창조성은 공유되고, 저작권은 분산된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에 집단성(collectivity)이라는 조잡한 모델이 수행했듯이 개인의 자기 확신이나 창작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텔레마틱 문화는 지구를 가로질러, 다른 마음과, 다른 감수성, 다른 감각과 사유 시스템들과 네트워크화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개인이 지구적 시야를 만들어내는데 참여하고, 이를 통해서 창의적으로 사유하고, 활기차고 강도깊게 경험하고, 세련되게 지각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확대시킨다. 여기에서 사유는 다양한 문화적, 지리적, 사회적, 개인적인 층위의 복합성을 통해 데이터라는 매체 안에서 순환한다. 네트워킹은 끊임없는 재규정과, 재맥락화를 지원하고, 따라서 어떤 언어나 시각적 코드도 최종적이지 않으며, 어떤 실체도 궁극적이지 않다. 텔레마틱 문화안에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시스템 안에서 순환하고 있는 이미지, 음악, 텍스트와 같은 관념들의 형식을 구성한다.
p.528
컴퓨터와 텔레마틱 포옹 덕분에, 볼 수 없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바라보고, 형언할 수 없는 생성의 카오스와 무질서에 감추어진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다.
p.529
미국 원주민 문화의 전체성을 향한 의지는 텔레마틱 예술의 총체적인 가능성과도 일치한다. 네트워킹은 정보의 상호교환을 위한 기술의 편리함 그 이상이며, 전 우주의 조화와 창조적인 개발에 필요한 정신적 상호교환의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이 안일하게 보일 정도로 낙관적이고 초월적이라 하더라도, 텔레마틱 포옹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은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FIN
피에르 레비/ 사이버스페이스의 예술과 건축-집단 지성(1994)
p.565
“위대한 작품들”이 디지털 정보 세계와 집단 지성을 위한 새로운 장소 안에서 성취되기 위해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시멘트, 유리, 강철로 영토를 계속해서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가 다시 유목민이 되려고 할 때, 그리고 새로운 이주를 위해 건축이 필요할 때, 우리는 피라미드를 지어왔다. 사유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디지털 길을 여행하게 될 것이고, 무게 없는 주택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도시의 유목민이자, 소프트웨어 공학기술이며, 지식 공간의 유체(liquid)건축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정신적인 건축이며, 완성되지 않은 지식 하드웨어 시스템이며, 기호들의 지붕으로 만들어진 회전하는 도시이다. 의사소통과 사유의 전형적인 매체인 사이버스페이스의 개발은 앞으로 다가올 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학적, 정치적 도전 중의 하나이다.
pp.567-568
…사이버스페이스는 문화적으로 흥미를 끄는 형식들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호출되고, 조종되고, 버려지고, 멀어지고, 결합되는 등, 어떻게 편성되던지 간에 메시지들은 어떤 유형으로든 수신자 주의를 맴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중매체에 의해 나타나는 상황과는 반대된다).
- 작가와 독자, 제작자와 관객, 창작자와 해석자 사이의 구분은 읽기-쓰기의 연속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뒤섞이게 될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기계와 네트워크 디자이너에서부터 궁극적으로는 다른 이들의 활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수용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서명의 기능 상실)
- 작가에게 귀속된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예술작품과 메시지 사이의 구분은 사라지고 있다. 이제 재현은 샘플링, 혼합, 재사용을 필요로 한다.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창조와 커뮤니케이션의 원칙에 의존하여, 정보의 유목적 분배가 광대하교 탈영토화된 기호학적 지평 주위를 오르내릴 것이다. 따라서 메시지를 만들기 위한 창의적인 노력이 메시지 자체로부터 의미를 만드는 방법이나, 과정, 언어, 역동적 건축과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사용된 환경을 만드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p.569
작품의 구현은 더 이상 개인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나 장소, 집합적 역동성에 의해 표출된다. 작가의 서명이 없는 예술이다.
p.574
나는 여기서 기초 없는 건축을 위한 사례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실용 해양학과 항해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보트와도 유사하다. 육체나 정신의 고정된 이미지에 비유되는 안정적 세계의 반영인 별 볼일 없는 상징적 구조가 아니다. 반대로 이동하는 건축은 확장하는 기호들의 우주를 여행하는 유목적인 우주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즉 육체의 끝없는 변형을 만들어낼 것이고, 살점이 갈라진 틈과 시간 안에서 신성한 기억의 군도를 향해 함대를 급파할 것이다. 미래의 건축은 재현의 극장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혼돈의 바다를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 도상들을 모으게 될 것이다. 집던적 두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원성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미래의 건축은 여러 소리와 노래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며, 순간적으로 불꽃처럼 빛나고 춤추는 궁전들을 세울 것이다.
*일부만 읽었다.
*로이 애스콧과 조지 랜도우 & 폴 들레니
*집단 지성: 사이버 공간의 인류학을 위하여(1994)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뉴로맨서Neuromancer 1984
-미디어 아트 공부에 너무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인데 왜 절판되었을까...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