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 윤원화, 2017, 미디어버스
p.15
실상 나무위키는 백과사전 형식을 빌린 커뮤니티 게시판에 가깝지만, 그것은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서 믿을 수 있는 레퍼런스 북이자 그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의 반석으로 여겨지며, 그런 점에서 책의 모델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집단으로 작성되는 레퍼런스 북 또는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레퍼런스 북 또는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역동적 종교 경전으로서, 나무위키의 특정 항목을 두고 발생하는 논란은 일종의 결투 재판을 통해 해소된다....요컨대 나무위키를 작성하는 것은 책을 쓰는 것인 동시에 일종의 게임 플레이다. 하나의 절대적인 책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결투 재판을 끝없이 계속하는 게임.
p.31
반면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해명이다. 그것은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어떤 관계로 연결되고 어떤 전체를 이루는지 보여준다. 세계의 모든 산과 강을 나열하는 것이 목록이라면, 어떤 강 옆에 어떤 산이 있으며 이들이 지질학이나 기상학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드러내 밝히는 것이 지도다. 지도는 복잡한 관계를 뒤얽힌 세계를 꿰뚫어보고 그 총체성을 종망한다는 전능감을 준다.
...목록이 기본적으로 언어적 분절에서 출발하는데 반해, 지도는 단일한 조감적 시선 아래로 모든 것을 정렬하는 지극히 시각적인 구성 방식이다. 그러나 대상을 나열하는 이미지-목록이 가능한 것처럼 대상을 '매핑'하는 텍스트-지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p.60-61
<빌딩>은 어쩌면 그 거대한 야망 때문에 불안정한 건축물 또는 불투명하고 읽을 수 없는 잿빛의 책이 되지만, 그런 한계를 감수하더라도 어딘가 높은 곳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p.69
...여태까지 만들어진 그래픽 디자이너의 문서들은 상황이 좋았든 나빴든 간에 동시대성에서 무시간성으로 이르는 일종의 시간적 호수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시간이 쏟아져 내린다.
여기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까. 지금 시점에서 미래를 단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미래는 이미 아른거리고 있다. 그것은 공간화할 수 없는 시간의 영역이다. 그리고 문서는 언제나 그렇게 불확실한 시간과 맞서는 도구였다. 불투명한 시간이 종이 위에 적힌 것과 아직 적히지 않은 것 사이에, 그 너머에 이미 실현된 것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 사이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했다. 문서는 현실과 분리된 소망청취의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도무지 틈새라고는 없어 보이는 현실 속에서 소망을 전개하고 작동시키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것으로서 시간을 열거나 또는 조절할 수 있다. 시간의 급류가 오래된 제도의 허약한 틈새를 침식하는 현 시점에서, 나는 우리들의 문서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잇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런 소망의 문서다.
*한시간 총서 1
*디자인: 강문식
*좋다.
*105*150mm의 귀여운 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