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어 스코어, 오민, 2017, 작업실유령
Score by Score, Min Oh, 2017, Workroom Specter
p.15
라바노테이션은 공간, 신체, 시간, 리듬 등 움직임의 요소들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는 체계로, 춤의 영역에서는 현재까지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보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존 가치가 있는 춤이나 특정 춤(혹은 움직임)의 무용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춤의 보존을 위해 라바노테이션으로 기록하는 경우, 주로 사후에 이루어지고, 안무가가 아닌, 전문 노테이터가 기록한다.
이 밖에 라바노테이션의 기호와 규칙들을 단순화시킨 '모티프 라이팅'(MotifWriting)이 있다. 일종의 수정된 라바노테이션이다. 라바노테이션이 움직임의 모든 형태와 디자인을 그대로 보존해서 재현하는 것까지를 다룬다면 모티프 라이팅은 특정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의 핵심적인 요소를 추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예컨대, 행위자가 점프 동작을 할 때, 라바노테이션이 그 동작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한다면, 모티프 라이팅은 그 동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움직임의 요소만을 기록한다.
p.17
오민: 현 시대에 춤을 기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인가?
김재리: 최근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인 영상 레코딩을 이용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춤의 형태를 기록할 수는 없다. 카메라의 앵글에 따라 그리고 언제 어떤 공연을 녹화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춤으로 보일 수도 있다. 움직임에 내재된 요소, 즉, 형태도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그 이면에서 형태를 떠받치는 요소들까지도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스코어는 구체화 이전 단계의 설계이건, 창작 과정에서 사용되는 소통의 도구이건, 춤이 끝난 이후의 기록이건, 생각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춤의 모양을 똑같이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무가의 생각에 관한 것이라면, 그 생각에 따라 기록의 방식이 바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리듬이 중요한 안무라면 움직임뿐 아니라 사고 자체도 리드미컬한 탄력이 필요할 수 있고, 이때 미묘한 타이밍을 표현하기 위해 사운드를 기보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세부적인 움직임이 중요하다면 모티브 라이팅을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pp.17-18
김재리: ...라바노테이션과 같이 보편적 문법을 가진 무보, 이본레이너의 동선 기보, 트리샤 브라운의 공간드로잉, 아너 테레사 더케이르스마커르의 악보를 곁들인 무보는, 그 춤의 정확한 동작과 동선을 확실하게 떠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안무가가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를 알아차리는 데 요긴한 실마리를 제고앟ㄴ다.
그자비에 르 루아는 렉처 퍼포먼스의 안무를 글로 기록하기도 했으며, 윌리엄 포사이스는 '싱크러너스 오브젝트'(Synchronous Objects)에서 춤이 공간에 그리는 흔적들을 그래픽으로 기록하고 이를 건축, 회화, 사운드 등의 작업에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에서는 '무용=움직임 예술'이라는 등식이 꺠지고 있는 듯하다. 이 시대의 안무가들은 발생하는 움직임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한번 만들어진 춤을 다른 시간, 다른 몸, 다른 감정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불안정한 신체를 통해서 똑같이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p.29
김재리: 노테이터들은 개별 안무의 의미를 이해한다기보다는 특정 시스템에 맞추어 춤을 기술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맡는다... 드라마투르그는 안무가의 작업에서 조언자 역할을 한다.
p.57
남화연: 아마추어 퍼포머와 작업하거나 리허설과 같은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몸이나 불안정한 상황에 매료되는 성향 때문인데, 그러한 몸이나 상황이 불완전하다거나 미완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미완결성이나 불완전함을 작업이 하나의 완성태로 포섭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움직이는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시간의 단위는 언제나 가변적일 수밖에 없고, 단위의 총합인 시간의 크기 역시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부 작업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미완결성이나 불완전함이 역설적으로 작업을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p. 71
박보나: 스코어는 완성돼서 제시되기보다 열린 구조로 방향을 제시하고, 퍼포머가 개별적인 완성을 이루거나 참여 관객에 의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민: 스코어에서 행동의 조건, 혹은 넓은 범위만을 제시하기 때문에, 보통의 열린 스코어보다 그 문이 조금 더 많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퍼포머들이 매 순간을 매우 능동적으로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예측하기는 꽤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 스코어는 이미 저자의 머릿속에 희미하게나마 그려져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기보다는 저자도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행동을 촉발하기 위한 방아쇠에 가까워 보인다.
*윌리엄 포사이드 '싱크러너스 오브젝트' Synchronous Objects
*디자인: 슬기와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