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박물관2, 오르한 파묵, 이난아 역, 2010, 민음사
Masumiyet Müzesi, 2008, Orhan Pamuk
p.34
이 '시간 밖'의 공간 외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에잔(이슬람 사원에서 하루 다섯 번 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통해 깨닫는 '공식적인' 시간이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깨닫는 것은 바깥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조정하는 의미인 듯 느껴졌다.
pp.34-35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 시간은, 즉 지금을 결합시킨 선은, 타륵 씨가 아무리 '잊어라.'라고 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바보나 기억이 없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완전히 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그저 행복하기 위해 시간을 잊으려고 애를 써 볼 뿐이다. 퓌순에 대한 사랑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추쿠르주마에 있는 집에서 보낸 팔 년의 시간에 의거한 나의 생각이 우습게 보이더라도, 독자들은 '시간'을 잊는 것과 시계나 달력을 잊는 것을 혼동하지 않기 바란다. 시계와 달력은 잊어버린 시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를 정돈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또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내가 살았던 삶은, '시간'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이라는 순간들이 결합한 선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일이 무척 고통스럽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순간들을 결합시켜 선을 만들거나, 우리 박물관에서처럼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을 결합시켜 선을 만들면, 결국 선은 끝에 다다르고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p.91
물건들의 힘은 그 안에 쌓인 기억만큼이나 우리의 상상과 기억력의 추이와도 연관되어 있다.
pp.206-214
69. 때로
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때로 퓌순의 표정을 보며 그녀가 몽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가 상상하는 나라에 가고 싶어졌으며, 나 자신, 나의 삶, 나의 과묵함, 식탁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무척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때로 퓌순은 이틀 연달아 같은 옷을 입었는데, 그래도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때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랑 영화에서 상봉과 키스 장면이 보이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했다.....때로 몸을 뻗어 퓌순을 만지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겨우 억눌렀다....때로 그녀에게 "널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그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때로 나는 "네가 그린 그림을 볼까, 퓌순?"이라고 하며 그림을 보러 갔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 그녀의 그림을 보며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p.263
도시 한가운데에, 포스포루스의 물속에,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퓌순과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죽음처럼 소름끼쳤다. 물결치는 바다에서, 꽤 커다란 파도가 퓌순을 흔들자 그녀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나를 붙잡기 위해 팔을 내 목과 어깨에 감았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그녀와 헤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 여자를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일기장을 다시 본 기분이다.
Y에게 전해주겠다고 챙겨놓았던 것들을 아직까지 방 한 켠에 놔두고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