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벗어나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2016, 이나라 역, 만일
Sortir du noir, Georges Didi-Huberman, 2015
p.13
...그럼에도 저는 영화의 이미지와 외침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속수무책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것을 고백해야겠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고통스러운 저의 악몽을 눈앞에서 다시 보는 듯 했답니다. 이 일은 개인적인 경험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실재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 바로 악몽의 힘입니다. 이것은 영화의 힘이기도 해요. 우리이게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게 실재 그 자체를 엮어 내는 악몽의 구조를 내보이는 일 말입니다.
pp.21-25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와 1945년 이후 끝없이 계속되었던 학살이라는 "암흑의 구멍"에 이들 시각예술이 "암흑의 이상"을 가능한 응답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위로에 복무한다는 핀계로 자신을 팔아 치우기 원치 않는 예술 작품은 현실의 가장 어둡고 가장 극단적인 양상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살아남기 위해 이것 [가장 어둡고 가장 극단적인 양상]을 닮아야 한다. 오늘날 급진적 예술은 어두운 예술arts sombre, 근본적 색채로서의 검은 예술을 의미한다. 숱한 현대의 생산품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색채에서 유치한 쾌를 취한다. 내용의 견지에서 보자면 암흑의 이상은 추상의 가장 심원한 경향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쓰인 것, 그려진 것, 작곡된 것은 암흑의 이상, 말하자면 즉물성toute objectivité의 결과라 할 수단의 비약함 속에서 동일하게 빈약해진다. 오늘날 아방가르드는 이 빈약함을 침묵의 지척am Rande des Verstummens까지 몰아간다.
그런데 당신은, 친애하는 라슬로 네메시 당신은 급진적인 어둠이나 급진적인 침묵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끔찍하리만치 불순하면서 소리와 색체가 생동해요.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고, 위급하지요.... 결국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지옥은 다채로운 지옥이예요.....그리고 물론, 다시 닫히는 여러 [소각기] 문의 검은빛 역시 빠짐없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암흑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당신은 어둠의 추상에서 어둠을 끄집어냈습니다. 마치 빛을 만들려는 듯이요. "완전한 빛toute la lumière"은 아닙니다. 아니지요. 법접할 수 없는 진리의 천국 바깥에서 빛은 결코 "완전하지"안아요. 당신이 떨쳐 낼 수 없었던 "암흑의 구멍"에 관한 어떤 빛을 만들려는faire une lumière 것이지요.
pp. 49-51
이미지는 어둠을 벗어나고 있어요sort du noir.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패닉image-panique이지요. 분별할 수 없음l'indistinction이란 무관심의 표식이거나 관찰의 결핍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마주한 사물을 응시하는 것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운반하는 일이에요.
p.53
...그러니까 죽은 아이를 해부학적 조각으로 만드는 일에서 빼내려는 시도, 아이가 소각장 화로에서 끔찍한 구멍에 들어가거나, 익명의 재가 되어 비스와vistule 강에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가 사울에게는 어둠에서 벗어나는 일일 거예요. 여기서 어둠에서 벗어나는 일은 망자의 비-존재함l'inexistence du mort에 저항하는 일일 것입니다. 적절한 의식과 그에 따른 기도, 랍비, 특히 경건한 매장에 대한 요구가 이로부터 생겨납니다. 망자가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pour que le mor existe 말입니다.
p.95-96
주[02]
히브리어 성서에서 '재앙','파국'을 뜻하는 쇼아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단어를 선호나느데, 홀로코스트에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호롤코스트는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톤[Holokauston:hólo(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몸 전체를 태워 희생한 동물을 뜻하며, 13세기에 접어들며 '불로 인한 파괴','대량 학살'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50년대 중반 영미권 역사학자들에 의해 자치의 유대인 학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p.100
주[0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우리와 '결부'된 이미지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때 '솟아오름surgissement'은 이미지가 우리와 결부되는 방식이라 할 만하다.
-영화 <사울의 아들>에 대한, 자그마한 서신 형식의, 비평.
서신 형식이기에 역자가 ~합니다, ~습니다. 라는 문체를 사용하는 것은 전략적일 수도
*참고로 책 디자인이 신경을 쓴 티가 난다.
책의 본문은 왼쪽 내지는 완전 블랙이 아닌 sombre 느낌의 흑색이 자리하고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연거푸 그 페이지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뻬다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기술적인 한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든 꿈보다 해몽 아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어두움과 밝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본문에 촉각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 부분과 해제 부분은 그렇지 않으면서 본문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어둡던 그 왼쪽 페이지들에게서 이따금씩 이미지가 나오게 될 때에는 영화관에서 뚝뚝 끊긴 필름의 한부분을 보는 듯 했다. 실제로 film still이기도 하였고..
(아마 너무나 기능적인 이유로 왼쪽 페이지에 뻬다를 넣게 되었겠지만,
심장의 위치와 죽어버린 아이의 존재를 위하던 영화 속의 사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것은 주가 따로 뒤에 배치가 되어 있었고, 본문에서 눈에 확 띄는 기호와 다르게 주는 []대괄호로 본문 텍스트와 같은 크기로 조판되어 있어서 자꾸 놓치는 것이었다...이부분만 opacity를 낮추었다면 좀 괜찮았을까?
**디자인 거의 동일한 건축 서적 발견함....87년도에 나온 "For an Architecture of Reality, Michael Benedikt" 참고.
역시 완전히 새로운 예술은 없는 것인가...!
*파리 레지던시에서 나의 스튜디오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memorial de shoah 였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게도 shoah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왜 이 책도 절판된거지...사고 싶다.
프랑스어 원어로 읽으면 한참 걸릴텐데...
**기 드보르 <사드를 위한 외침Hurlements en faveur de Sade> 1952
P.Levi, Les Naufragés et les rescapés
모리스 블랑쇼, 이당승 역,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F. Kafka, "Le silence des Sirèns" 1917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