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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2012, 민음사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2012, 민음사

The Naïve and The Sentimental Novelist, Orhan Pamuk, 2010






p.20-21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또는 'naive'한 동시에 'sentimentalish'해야 하기도 하지요. 이 분류는 1795년에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Über naive und sentimentalishe Dichtung)」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실러가 천진함과 순수함을 잃고,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현대 시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 독일어 단어 'sentimentalisch'는 사실 '감상적인'이라고 옮겨야 합니다....우리는 실러가 'sentimentalisch'라는 단어로 자연의 단순함과 힘에서 멀어져,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지나치게 몰입한 어떤 정신 상태를 설명했다는 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pp.26-31

소설 읽기란 이 작업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찰적인 소설가들만이 이 작업을 감지하고 세세하게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소설이 우리에게 아무 사건도 던져주지 않고 수업시 많은 잎사귀만 일일이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서술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 잎사귀들이 모여 결국에 어떤 이야기를 형성하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머릿속으로는 항상 배후 어딘가에 있을 어떤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숨은 중심부를 찾습니다.

2. 우리는 머릿속으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말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가가 설명한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합니다....소박하게 소설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잊는 것과 어디까지 상상인지 성찰하며 궁금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하지만 소설 예술의 영원한 힘과 생명력은 이러한 모순들로 이루어졌고, 자신만의 특별한 논리에 의거합니다. 소설 읽기는 세상을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한 가지 이상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 

4. 우리는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것일까?...소설 예술의 심장부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적절한 형태를 부여한다면,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이러한 낙관주의 아래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합니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는 소설의 심장부에 있지 않고, 심장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6.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도덕적 판단은 피할 수 없는 늪입니다. 다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메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7. 우리 머릿속에서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이렇게 해서 우리는 작가와 어느 정도 공범 관계가 됩니다....

8. 우리 기억도 한편으로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합니다....거대한 풍경 속으로 걸어갈 때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의 의미는, 이전에 마주쳤던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짜여진 소설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전체 관계망은 책의 분위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주의를 집중해서 찾고있고, 찾아야만 하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p.34

E.M.포스터는 『소설의 이해』라는 책에서 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은 우리가 그것에 느끼는 애착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소설의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게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 나서게 만드는 힘에 있습니다. 



p.67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는 주인공을 발명한느 것입니다! 작가가 성공적으로 주인공을 만들고 나면, 주인공이 소설가에게 소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연극의 프롬프터[각주:1]처럼 속삭여 준다는 것입니다. 



p.73

소설가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화되고 나 자신 밖으로 나가, 이전에 내가 소유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35년 동안 소설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위치에 나 자신을 놓으며 내 영혼을 길들였습니다.



p.78

내 본성의 이 소박한 면을 이야기하자면,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예를 들면 빅토르 시클롭스키 같은 학자가 있겠지요.) '구조 이론'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플롯 또는 서사 구조 또는 사건의 연속 또는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설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지점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선은 소설의 재료나 내용, 그러러니까 소설 그 자체가 아니라, 소설을 구성하는 텍스트 전체에 흩어진 수천수만 개의 작은 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서사 단위, 주제, 모티프, 하부 이야기, 작은 이야기, 시적 순간 사적인 경험, 지식 등등, 이 점들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이것들은 내게 소설을 쓰도록 독력하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작은 에너지 공들입니다. 나보코프는 『롤리타』에 관해 썼던 어떤 글에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이 점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잊히지 않는 것들을 '신경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자처럼 이 점들 역시 나뉘거나 다른 것을 환원될 수 없다고 나는 느끼곤 했습니다. 



4.

단어, 

그림, 

사물



pp.94-94

           단어와 이미지, 문학과 그림의 유사성을 환기하기 위해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론』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시는 그림과도 같다."를 인용하는 것은 관례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호라티우스가 호메로스도 형편없는 구절을 썼다는 의견을 피력한 후 갑자기 말해 버린 이 유명한 말 다음에 이어진,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도 좋아합니다.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과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사이의 유사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시는 그림과도 같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보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것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영향을 끼친다. 어떤 그림은 어두운 구석을 좋아한다. 어떤 그림은 비평가의 날카로운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꽤 빩은 곳에서 감상해야 한다. 어떤 그림은 한 번에 마음에 들어오고, 어떤 그림은 열 번 정도 보았을 때 사람에게 즐거운을 안겨 준다."

           호라티우스는  『시론』의 다른 행에서도 시를-문학을-설명하기 위해 그림 비유와 미술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의견과 사례는 시와 그림에서 얻는 즐거움이 유사하다는 정도에 머무릅니다. 문학 예술과 시각 예술 사이의 진정한 '구분'은 독일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라오콘』(1766)이라는 책에서 분석적 논리를 통해 제시됩니다....시(문학)는 시간에 기반을 둔 예술입니다. 그림이나 조각 같은 시각 예술은 공간을 기반을 둔 예술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싱은 문학 예술과 시각 예술의 기본적인 차이를 칸트의 유명한 두 인식론의 범주로, 시간과 공간으로 환원시켰습니다. 


p.111

그림은 우리에게 실재의 직접적인 묘사 또는 모방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 앞에 있을 때는 단지 그림에 속해 있는 세계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라는 그림 앞에서 느꼈던 것처럼, 그림의 객관적 실재성과 물성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에 대한 묘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묘사들을 우리 상상 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만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합니다. 소설 예술은 먼저 그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단어로 설명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책 표지 왤케 귀염뽀짝...?


*E.M. 포스터 <소설의 이해>




  1.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대사를 알려 주는 사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