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빌렘 플루서, 윤종석 역, 2015, 엑스북스
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 Vilém Flusser, 1987, Edition Flusser, Volume V
0. 서문
p. 17
...소위 말하는 진보는 더 나아지는 것과 무조건 동의어는 아니다. 공룡도 당시에는 그 나름대로 멋진 동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라는 형식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현재 의문의 여지가 많다.
글쓰기에 있어서 특수한 것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점에서 글쓰기가 그와 비교가능한 과거와 미래의 행위들 - 그림 그리기 행위, 즉 대리석 표면에 라틴어 자모음을 정으로 새겨넣는 것, 비단 위에 붓으로 중국인의 표의문자를 그리는 것, 칠판 위에 방정식의 기호들을 휘갈겨 쓰는 것, 타자기 자판을 두드리는 것 등에 공통되는 어떤 특정이 존재하는가? 글쓰는 행위를 시작하기 전에는 인간이 과연 어떤 종류의 현존을 영위했을 까? 만약 인간이 글쓰기를 포기한다면 그의 현존재는 어떻게 될 것이다? 등과 같은 의문들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의문들은 분명히 글쓰기 자체뿐만 아니라 쓰여진 글의 읽기에 맞춰져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단 단순한 의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쓰여져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의 난점, 즉 그 책 자체도 그저 하나의 책 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 도출된다. 책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풀려져야만 할 의문이다.
1. 메타문자
pp. 19-20
모든 글쓰기는 "정확하다". 그거은 문자기호들을 정돈하고 질서짓는 하나의 동작이다. 그리고 문자기호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사고들을 위한 기호들이다. 따라서 글쓰기는 사고들을 지향하고 정돈하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미 사전에 메타적으로 사유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문자기호들은 정확한 사유행위로 안내하는 인용부호들이다.
p. 21
글쓰기 행위 중에 사유는 행별로 정돈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유들이 쓰여지지 않고 그 사유 자체에 방치되어 버린다면, 사유는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순환하는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사유들의 이와 같은 순환상태-바로 그러한 순환상태 때문에 모든 개개의 사유들은 그에 앞선 사유들로 되돌아갈 수 있다-를 특수한 문맥에서는 "신화적 사고"라고 지칭하고 있다. 문자기호들은 신화적 사고로부터 선형적으로 배열된 사고로 안내하는 하나의 인용부호이다. 앞으로 다시 그 근거를 따져보겠지만, 이와 같은 정확한 사고를 "논리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문자기호는 논리적 사고로 안내하는 인용부호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인용부호, 다시 말해서 따옴표("")를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단어"는 하나의 단어이지만, "문장"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단지 문자로 기술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을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한 사유들로 어지럽기 때문이다. 어떤 포괄적이고 매우 함축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문자기호들이 따옴표라 할 수 있다.
p. 23
글쓰기의 동작은 역사의식을 출현시켰으며, 이 역사의식은 항상 또 다른 글쓰기에 의해 스스로를 강화, 심화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글쓰기 자체를 점점 더 강력하고 밀도 있게 되도록 한다. 글쓰는 사람과 역사의식 사이의 이러한 피드백은 의식에 대해서 점차로 증대되는 어떤 긴장을 야기시키는데, 그러한 긴장이 의식을 항상 앞으로 전지해 나가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운동역학이다.
p. 25
...우리는 전체 역사를 자신감 있게 자동적인 기계들에 위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기계적, 자동적 도구들이 우리보다 역사를 더 잘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것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 미래가 있는가?"라고 물을 때마다 이 에세이는 바로 이 무엇에 전념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각명문자
p. 31
새기면서 각명문자를 쓰는 사람은 그에 의해서 새겨지는 대상이 너무 빨리 소멸되지 않기만을 소망할 뿐이다(새기는 글을 쓰는 자가 신이었더라도 그럴 것이다). 그가 이제 대상들의 파악과 가공에서 확신하고 있는 것은, 대상들에게 있어서는 소멸로 이르려는 경향이 정반대로 그 대상에 정보를 주고자 하는 "정신"에 대항하는 대상의 저항으로 이르는 경향이라는 점이다. 즉 대상들이 더 좋은 기억들을 가지면 가질수록, 대상 속으로 새기는 것은 더 힘들어진다(예를 들면 청동이나 대리석). 반대로 대상 속으로 새기는 것이 더 쉬우면 쉬울수록(예를 들면 흙), 대상 속에 새겨진 정보들은 점점 더 빨리 소멸된다. 만약 문자가 오랜 세월 동안 읽혀질 수 있게 되려면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모험이 될 것이고, 반대로 힘들이지 않고 쓰여진 문자라면 얼마가지 않아 읽힐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유쾌한 선택이다. 새기는 글쓰기는 이러한 선택 앞에 세워져 있다(그리고 모든 정보주기는 전자기적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발명 앞에 세워져 있다).
pp. 34-35
글쓰기가 진보되면 될수록, 글쓰는 송곳니는 우리 기억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표상들의 심연들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밀고 들어가 표상들을 파괴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며 개념들로 코드변환한다. 행들을 따라 기억("무의식")의 깊은 심연으로 그리고 표상들에 의해 노출된 객관적 세계를 향해 이와 같이 글쓰기가 행진하는 것이 우리가 바로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역사는 계속 전진하는 파악[거머쥠]이다.
3. 표면문자
pp. 38-39
각명문자들은 힘들고 느리면서도 따라서 신중하게 만들어지는 문자들이다. 그것은 "기념비들"(Monumente)이다("monere"라는 라틴어는 "기념하다"라는 의미이다). 표면문자들은 가볍게 표면들 위로 던져진 문자들인데, 그 문자들의 의도는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들은 "기록문서들"(Dokumente)이다("docere"는 "가르치다"라는 의미이다). 각명문자는 기념비적이고, 표면문자들은 도큐먼트[기록]적이다.
p. 41
깃털들은 항상 반복해서 교체되어야 하고, 잉크스탠드에 꽂혀져야 한다. 심지어는 기술적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발전된 타자기의 경우에는 잉크리본의 교환이 필요하다. 아무리 발전되었다고 하더라도 잉크의 흐름을 이용한 필기도구라면 어쩔 숭 벗다. 또한 기호들로 덮여지는 표면들도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약 먼저 쓰던 페이지가 더 덮히면, 또 다른 새 페이지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표면문자가 텔레타이프[Teletype; 자동식자기]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비로소 끊어짐이 없는 글쓰기 흐름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4. 자모음
p. 32
0. 서문
p. 32
0. 서문
p. 32
0. 서문
p. 32
0. 서문
p. 32
-사랑한다 빌렘 플루서
*텔레타이프[teletype; 자동식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