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2021, 창비
우리의 사람들
p. 21
친구들은 죽으려고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친구들은 그곳에 간 친구들은 늘 조금씩 바뀌지만 누군가는 빠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간 친구들은 늘 조금씩 바뀌지만 누군가는 빠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대 없는 표정으로 그곳에 가 사진작가가 하는 말을 흥미롭게 듣다가 하지만 흘려듣다가 슈퍼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먹고 바람이 부는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을 할 것이다. 그러려고는 아니지만 그럴 것이다. 부산에 있는 나는 그게 나라고 확실히 알지만 얼굴은 나의 얼굴이 아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거리이거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모차를 밀며 용두산공원을 걷는 그 사람이 나인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바람 속의 친구들 이게 뭐야 이상하네 하고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들 하지만 친구들은 무얼 하려고 간 것이 아니다.
건널목의 말
pp. 45-46
말을 하기 싫을 때 자꾸만 말을 의심하게 될 때 다시 부산에서 쉬고 싶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했다. 부산이 무슨 말의 고장인 것도 아닌데. 아니 아니 말에서 자유로운 공간인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여기가 아니면 아무 데라도 상광이 없어서 부산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부산이어야 했는데 부산으로 정해버린 것이 조금 우습다 생각할 뿐이었다.
pp. 49-50
땅에 묻힌 말은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선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말들은 흙과 섞여 거기서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머릿속 그림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
p. 113
⏤그런 걸 보고도 괜찮은 거야?
⏤괜찮진 않지만 그게 별로 선택적이지는 않아서 대부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어.
매일 산책 연습
p. 163
용두산아파트 안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원맨션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아파트 중간에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파트 안에 대중목욕탕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그러나 가장 들어가보고 싶은 부산의 아파트는 부산데파트인데 부산데파트의 내부는 최동훈의 영화에서 자세히 보았으니 안 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부동산에 연락해 매물로 나온 용두산아파트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방금 그곳은 나갔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중에 비슷한 곳 나오면 보고 싶어서 그런데 한번 볼 수 없나요? 붇고 그는 내부를 보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p. 165
어디에서는 무엇이 봉고 또 그곳에서는 다른 것이 보이고 무언가를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오르고 숨기 위해 창문을 닫는다. 그런데 어떤 장면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것은 찍을 수도 찍힐 수도 없었다. 보는 사람은 있었을까 그것조차 알 수 없다.
p. 176
밥 딜런은 1962년 초 봄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썼고 그는 초연을 하기 전 "지금 부를 이 곳은 저항곡이 아니며 그런 식의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항곡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을 쓸 뿐이다"라고 소개했다. 이후 딜런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응하여 「폭우가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를 쓴다. 이후 해당 곡의 초연을 듣기 위해 카네기홀에 모인 청중 모두 「폭우가 쏟아지네」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카네기홀의 청중은 딜런의 새 노래에 감동받았고, 몇주 후 실제로 미사일이 발견되자 그들은 경악했다. 이 부분을 읽다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미리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이 아니에요. 나는 이책의 번역자는 광주라는 사건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그후 시간의 의미를 묻고 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1980년 5월에 그들 자신이 광주에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음을 역시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을 붙인 이후의 시간을 미래라 생각하였을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가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여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여왔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p. 179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미래를 연습하는 훈련을 거치겠다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하다가 그것을 묻고 되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다면 끌어노 미래도 이미 일어난 과거로 혹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로 믿을 수 있는가.
강보원, 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있기
p. 226
사실 다른 사람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보더라도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불안과 함꼐 있는 일이기도 하다.
p. 227
한편으로 박솔뫼의 요지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다른 사람의 집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언어와 맺는 관계와 관련이 있다. 하이데거의 테제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인데, 박솔뫼에게 이때의 조사 '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소유권을 내포하지 않는다. 존재는 언어라는 낯선 집에서 소유권 없이 살아가야 하며 자신의 집이 아닌 곳을 집으로 삼아 지속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안은 항상적인 것이다. 1
p. 258
...이제 우리는 박솔뫼의 소설에서 왜 모두가 돌아오지 않는 고립된 공간이 수수께끼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머물러 있는 공간을 그려볼 때, 그곳에 대한 글을 쓸 때, 그것은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그들과 함께 있는 어떤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단지 그들이 거기에 여전히 있는 장소를 보존하는 일, 그 시간과 우리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여전히 같은 곳에 속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그들에게 거기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믿는 일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수없이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말들을 계속 다시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영주동 거북탕
- 매일 산책 연습과 이미 죽은 열두명의 여자들과
-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출판, 2008, 454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