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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조건: 비평이 권력이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고동연・신현진・안진국, 2001, 도서출판 갈무리

비평의 조건: 비평이 권력이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고동연・신현진・안진국, 2001, 도서출판 갈무리

 

 

 

 

 

류병학, 전문가로서의 비평가: 너희가 비평을 아느냐

p. 68

  ...그리고 당시 제가 미술세계로부터 받은 원고료는 적잖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정민영 편집장 본인 월급을 저에게 원고료로 보냈던 거예요. 그 사실을 저는 10년이 지난 후에 알았어요.

 

p. 81

  그러니까 나를 덜어버리는 게 필요하죠. 작가를 위해 쓰는 거니까요. 그게 비평이 되는 거죠. 비평은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에게 더 필요한 지점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접근해주는 거지요.

 

 

김장언, 분열된 현재적 주체

pp. 99-100

그러는 와중에 어떤 작가 그룹이 자신들의 아티스트북을 만드는 데 글을 써달라고 하기에, 제가 좀 다른 글을 써도 되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당신들의 작업에 대한 비평은 아니고, 당신들의 작업과 태도에 영향을 받은 어떤 새로운 글을 쓸 거고 그것을 가상의 인물 이름으로 발표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흔쾌히 좋다고 이야기하더니 출판사 핑계를 대면서 수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서 잡지사에 발표했던 리뷰를 싣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요. 그 작가들은 인식도 못 했지만, 그 글과 함께 새로이 발명된 필자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저에게는 거대한 발걸음과 같은 시도였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이러한 비평가의 도전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거나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을 찬미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할 뿐이죠. 

 

pp. 114-115

작가는 동료보다는 도와줄 사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만을 찾는 경향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죠. 아이디어와 사유체계의 차이를 구분 못하고, 아이디어 차원에서 계속 맴돌거나 미끄러지는 것 같습니다. 조형 언어를 탐구하기보다 아이디어 경쟁을 하느라 모든 작가가 서로 곁눈질하면서 고독하게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도 같이 토론하고 나누어야 발전하는 것인데 말이죠.

 

 

서동진, 전비판적 주체와 역사적 비판

pp. 119-120

  제가 지극히 불편해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동시대 미술인데, 그 동시대 미술은 제가 지금 있는 역사적인 시간성으로부터 탈출한 상황을 가리킨다고 봐요.

 

  동시대라는 것이요?

 

  어제도 동시대, 오늘도 동시대, 내일도 다 동시대라는 점에서 동시대는 독특한 시간의 감각방식이란 거죠.

 

모순적일 수도 있기는 할 것 같은데요. 그 시대 안에 있으면서 그 시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비교적 단순한 서술은 가능해도요. 

 

그때그때마다 재미난 주제들이 역사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이를테면 패션이나 유행처럼 그저 특정한 시간대의 아이템 같다면 숱한 주제들의 기획전은 시대의 알레고리로서의 주제나 성좌를 헤아리는 일은 아니었다 싶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역사적 비평에서 숨 가쁜 주제 비평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게 근년의 비평 추세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오늘의 미술 판, 점잖게 말해 글로벌 아트 신global art scene이란 게 있다면 그 내에서 큐레이터들 사이에서 지지받거나 공유하는 주제, 마치 여론조사와 같은 선호에 따라 선택된 주제들이 전시와 비평, 이론의 방향을 일시적으로 선도하는 그런 흐름이 일반화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p. 131

자생선에 대한 숭배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신자유주의의 요체가 사회나 구조는 없다. 각각의 구체적인 개인과 그의 경험뿐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해당되는 미학적 버전도 있지 않겠어요? 말 그래도 지금 내가 경험하는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간이라는 진단에 동의합니다만, 그래서 시간성의 종말을 이야기하거나 현재주의presentism의 도래를 거론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수긍하지만 그 주장이 그러니 이제 우리는 시간성의 비판적인 의식과 경험을 위한 개입과 노력을 단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거든요. 현재를 초과하는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을 텐데, 그리하여 그러한 시간의 경과와 관계를 서사화하려는 노력, 이를테면 시간성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 불가피할 텐데, 감정/정동에만 휘둘리고 이를 작가가 회피한다면 그래도 예술적 실천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는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비판적 분절articulation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p. 132

...자본주의는 추상이 지배하는 사회이지요. 그런점에서 저는 예술적 실천이 구상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일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추상의 힘에 저항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적인 추상화에 반대하는 어떤 그런 추상화를 하는 것이 작가들의 일이고 그 점에서 저는 예술이 역사적인 시대의 지배적인 지각의 질서(감각이나 경험의 질서)와 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홍경한, 미술잡지와 비평가를 둘러싼 권력의 제국

p. 209

예술경영과 기업경영을 분간하지도 못하는 '예술경영지원센터'와 같은 정부 산하 기관에서 시장 좌판 깔아주면 좋다고 앉아서 그림 세일하는 작가들, 작가란 어떤 존재인지, 평론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구분도 못 하고....그래서인지 때로 미술계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돼요.

 

 

심상용, 자본주의와 예술

p. 290

미술사 강론과 작가론과 큐레이팅 담론은 오히려 비평을 억압하는 비-공간, 무-장소화가 되어가고 있고요. 설정할 만한 '외부'가 없을 때는 모든 곳이 외부가 되어야 합니다. 

 

 

현시원, 포스트-목적론적 시대의 수행적 글쓰기

p. 307

  나의 존재가 필요하기는 했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2010년의 규정은 2010년대가 지나서, 사후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었어요....내용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는 이영철, 김장언, 현시원의 이름만 필요했던, 마치 PPT 파일과 같은 포맷의 이벤트였어요. 저는 렉쳐보다 글이 더 많은 걸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온 편이에요.

 

 

정민영, 비평의 대중화: 독자 없는 비평은 가능한가?

pp. 386-387

  비평이 미술계 내부문건으로 존재하는 데 만족한다면, 사실 이런 이야기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더 많은 독자와 공유하고 싶다면 한 번쯤 고려해봤으면 해요. 어디까지나 미술계 바깥의 많은 독자와요. 알다시피 사람들은 대개 스토리에 반색합니다. 제가 주력하는 미술 대중서라는 것도 결국 스토리 없이 유통되던 미술책에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이거든요. 지금까지 언급된 저자의 자기 노출이니, 에피소드의 활용이니, 전략적으로니 하는 것도 흥미라는 양념을 가미한 스토리텔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스토리에 대한 정리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거칠게 말해서 그냥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요소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머리에서 가슴으로, 머리에 호소하는 책이 전문서라면, 가슴에 호소하는 책은 대중서가 되겠죠. 같은 맥락에서, 머리에 호소하는 비평도 이젠 독자의 가슴으로 조금씩 하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지금까지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이게 되겠네요. 

 

 

양효실, 여성 미술, 차이의 비평

p. 396 

  ....고정희 시인의 말처럼 '상한 영혼'으로 세월을 견디는 듯해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죠. 결국에 다 어떤 정치적인 세력들로 함몰된 위험이 크거든요. 미투 또한 권력화, 집단화되면 어렵지 않게 개인을 소멸시키거든요.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죠. 

 

p. 401

 그래서 예술은 웃음이기도 한 거예요. 저는 계속 웃음 얘기를 해 오는데요. 약자가 자기 연민, 나르시시즘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 자기 경험을 비틀어서 나오는 자기 강함, 즉 "나는 너의들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그로 인해서 내 삶이 비참해지지 않았다."라고 얘기할 때 나오는 게 예술이고 그것은 예민해야 가능해요. '예민하다'는 것은 자기에게로 무사히 돌아오는 대신에 계속 현장에 남아서 우수리들, 그림자들, 침묵들, 희미한 존재들을 감지해내는 것이거든요 자기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그곳을 기꺼이 책임지는 것이죠. 그래서 약자이지만 동시에 약자가 아닙니다. 

 


 

*마크 테, 나임 모하이멘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90년대 연구가 많지 않은 시점에서, 2020년의 시점에서 2000년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인듯.

각각의 인터뷰들이 질감이 매우 다른데, 특히나 양효실 선생님은 수업을 들었어서 그런지 인터뷰를 읽는데 음성지원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옛날에 홍경한 비평가의 강연에서 그가 (울분을 토하며<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다) 아트스타코리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기억에 남는다. 20대 초반의 나이라서 그 감정이 꽤나 인상이 깊었는지,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나곤 했었다. 개인이 가지는 감정의 프로세스를 모두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아트스타코리아와 관련해서 가졌던 그 (나에게 울분으로 기억되는) 감정을 좀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