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범죄, 그리고 그에 덧붙인 혹평들, 할 포스터, 손희경・이정우 역, 2006, 시지락
Design and Crime, Hal Foster, 2002
제1부 건축과 디자인
2장 디자인과 범죄
p. 30
1912년 크라우스는, 예의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이 구별지음의 결여lack of distinction란 "모든 미래의 삶과 투쟁"을 가로막는 결여, "활동 공간running-room"의 부재라고 설파했다. 1
p. 33
...통례상 디자이너로 인정되는 범위가 전례 없이 넓어졌다. 그 폭은 매우 넓어서 매우 상이한 기업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사회 그룹들을 관통한다. 디자인 상품이 당신의 가정인지, 아니면 당신의 사업인지, 혹은 당신의 축축 늘어진 얼굴(디자이너 성형술)이거나, 혹은 당신의 꾸물거리는 성격(디자이너 약품)인지, 아니면, 당신의 역사적 기억(디자이너 미술관)이나 당신의 유전자 미래(디자이너 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디자이너 행세를 하거나 혹은 디자인되기 위해서 엄청나게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디자인된 주체"는 포스트모던 문화가 자랑하는 "구축된 주체"가 낳은 예기치 않은 새끼인가? 한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당신이, 소비주의의 올가미가 자신의 자기중심적 논리를 최대한 바짝 조이고 있다고 느꼈다면, 옳게 생각한 것이다. 디자인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활동 공간"을 허락하지 않은 채, 생산과 소비의 완벽에 가까운 순환을 지원한다.
p. 42
디자인은 전적으로 욕망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낯설게도 이 욕망은 오늘날 거의 주체를 상실하고 있거나, 혹은 최소한 결핍될 수 없는 욕망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 새로운 나르시시즘으로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내면성이 없는no interiority 전적인 이미지이고, 주체(제)의 잠재적 사라짐에 대한, 주제(체)의 신격화다.
3장 대목수 (건축가 게리에서 조각가 게리까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pp. 55-56
이제, 게리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라는, 아니면 적어도 위대한 조각가라는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우선 비교해볼 만한 현대 조각의 명작들을 꼽아보자. 게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는 미니멀리즘 조각가 칼 안드레의 작업은 좋은 (확실히 간명한) 예가 될 것이다.....숨은 아마추어들의 지원을 받아 인체를 모델링(이런 견지에서 모든 조상들은 자유의 여신상과 마찬가지다)하던 때로부터, 대상의 "내부 구조"를 노출시키는 모더니스트들의 작업(1920년대 뼈대를 드러낸 조각을 만든 구성주의 조각가들을 기억하라)을 지나, 주어진 장소에 집착하는 당대의 작업들-1960년대와 1970년대의 대지미술이나 오늘날의 다종다양한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업들로 넓혀진 조각의 새로운 영토에 이르는 긴 여정 말이다.
어떻게 건축-조각가 게리가 이 역사의 일부일 수 있는가? 요컨대 그는 시간의 환상선을 탄다. 다른 많은 신규 미술관들처럼 게리의 공간들도 전후 미술의 확장된 영토, 즉 안드레와 세라, 그리고 많은 문하생들의 영지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난 크기로 디자인되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신규 미술관들은 이 미수르이 축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술관들은 애초에 전후 미술이 현대 미술관modern museum에 대항하기 위ㅐ 취했던 거대한 스케일을, 동시대 미술관contemporary museum이 관람객은 물론이요, 어떤 미술이라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초대형 스펙터클-공간으로 부풀기 위한 핑계거리로 삼는다. 간단하게 말해, 빌바오 같은 미술관은 전후미수르이 분출을 이용해, 넓혀진 미술의 영역에 권리의 울타리를 치고, 뜻하는 대로 관람자들을 압도해보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디어의 역사를 역행하는 최근의 게리 빌딩들은 조각 작품으로 보자면 퇴행적이다.....또, 게리는 빈번하게 세라와 관련 지어진다. 그러나 세라의 조각이 구축 질서를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노출하는 데 반해, 게리의 건축은 구조역학적으로 불명료해 보인다. 그의 프로젝트 몇몇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기업의 광장에 세워진 싸구려 조각이 건축적 스케일로 뻥튀겨진 것 같고, 깡통따개로 열 수 있을 것만 같다.
p. 62
세상이 "빌바오 효과"라고 부르는 "1997년 10월 열린 오프닝 전야제에서 드러난 경제・문화적 충격"은 "전 세계의 당대 건축가들에게 유사한 위업을 달성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오호통재라. 그러니 기대하시라 독자 여러분. 대단한 건물이 (테러의 표적이 되는 것을 불사하며) 조만간 여러분의 고향에도 하나쯤 세워질 듯하니.
4장 건축과 제국 (정신착란증의 뉴욕에 대한 코멘터리가 흥미롭다)
pp. 82-83
주강 삼각지 개발 사업은 지휘통솔command과 시장 경제의 혼합인데, 뉴욕타임스지는 이 결합을 "시장 레닌주의Market Leninism"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콜하스는 예의 버릇대로, 고체와 유체의 낯선 조합을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지형학적 아이콘을 끼워 박았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콘은 약 120km 길이의 고속도로였다. 도심들을 연결하는 이 고속도로는 홍콩의 개발업자 고든 우Gordon Wu의 사유물이다. 중국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고든 우는 그곳의 모든 유료도로를 고가도로 형태로 건설했다. 도로는, 그가 장차 도심으로 개발하기로 작정한 곳과 만나는 교차점에서만 땅으로 내려온다. 콜하스는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를 공산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모델 속에서 탄생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빗대어 "시장 리얼리즘©Market Realism©"이라 명명한다. "미적거리는 동시에 극으로 치받쳐 오르는 욕망에 대한 참신한 처방"인 시장 리얼리즘은 "시장의 약속과 시장의 방출 사이에서 존재하는 현재적 간극 사이"에 기초한다. 선전의 많은 고층빌딩들은 이와 같은 틈 속에서 뻗어 나왔다. 부동산들은 거주를 위해 디자인되었다기보다는(이러한 경향은 매우 적다) 투자를 위해 디자인된 (선전엔 고층빌딩들에 헌정된 주식거래소도 있다) 것이다.
제2부 미술과 아카이브
5장 현대 미술의 아카이브
pp. 91-94
이러한 '보는 행위의 변증법'을 논하면서 내가 제시할 첫 번째 짝은 보들레르와 마네다. 보들레르는 「1846년의 살롱The Salon of 1846」이라는 글에서 "기억은 예술의 위대한 판단기준이며 예술은 아름다운 것의 기억술이다"라고 썼다....노골적인 인용의 패스티시 따위ㅣ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이러한 기억 잔상의 하위텍스트성subtextuality은 보들레르에게 예술적 전통-어원적 의미에서 잠재적 의미들의 전수passing-on인 "전통"-을 구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보들레르에게 기억은 회화의 매개체인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두 가지를 수정해야 할 듯하다. 첫째, 이러한 잔상들은 반대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 이는 T.S. 엘리엇이 「전통과 개인적 재능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1917)을 쓴 이래 익숙해진 역전의 경우다. 기억이 동화작용을 일으킴으로써 <조각배>가 <뗏목>에 거꾸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전통은 절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축되는 것이며, 항상 드러나는 것보다 더욱 잠정적으로 구축된다. 이 잠정성은 우리에게 내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더니스트들이 전통을 억압적인 짐으로 느꼈던 반면, 우리는 전통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느끼고 싶어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우리 중 몇몇이 마치 우리가 습관적인 애착 혹은 적대의 대상으로서 전통을 필요로 하듯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전통에 계속해서 무게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둘째로, 보들레르가 암시한 예술적 실천의 모델은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미술-사적이며, 이미 그 기억 효과의 구조로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상정하고 있다. 그 공간은 (실제이기보다는 상상으로) 예술적 전통이 발생하는 곳이다. 달리 말하면 이 "아름다운 것의 기억술"은 그러한 변형이 만들어지는 아틀리에와 스튜디오 사이에서, 그리고 다른 것들에 효과를 발휘하는 전시와 미술관 사이에서 제도적 중계를 담당한다. (이 중계는 물론 살롱 비평가들, 리뷰의 독자들, 캐리커처 만화가, 가십 등의 많은 담론에 의해 더욱 확대된다.) 짧게 말해 보들레르의 도식에서 회화는 기억의 예술이며 미술관은 그것의 건축물이다.
아도르노에게 발레리는 "과거의 예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곳이 미술관이라는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독일인 비평가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 3인 양 "미술관museum과 무덤mausoleum은 발음적 연결 이상으로 연관되어 있다"라고 썼다. "미술관들은 미술작품의 가족묘와 같다. 미술관들은 문화의 중립화를 증언한다." 4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것은 미술관을 "사물화"와 "혼돈"의 장소로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스튜디오 안의 미술 생산자가 지닌 견해인데, 그는 이를 프루스트가 제시한 견해와 구분했다. 아도르노의 도식에서 프루스트는 발레리가 멈춘 지점-"작품의 내세"-에서 시작한다. 즉 프루스트는 그 지점을 스튜디오의 미술 생산자가 아니라 미술관 내의 관객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본 것이다. 프루스트 같은 이상주의적인 관객에게 미술관은 일종의 환영과도 같이 스튜디오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곳은 예술 생산의 물질적인 너절함이 제거되어 사라지는 영적인 공간이다-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모든 장식적 세부사항을 냉정하게 제거한 방들로서 예술가가 작품 창작을 포기하는 내적인 공간을 상징한다." 5 프루스트에게 미술관은 실제가 사물화된 장소라기 보다는 환상적 재생의 장소이자, 사실상 영적 이상화의 장소다. 6
p. 99
[각주15] 기억의 위기에 관해서는 Richard Terdiman, Present Past: Modernity and the Memory Crisi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3)을 보라. "Tradition's Destruction: On the Library of Alexandria", October 100 (Spring 2002)에서 다니엘 헬러-로즌Daniel Heller-Roazen은 기억의 상실이 아카이브(도서관과 미술관 모두)에 파명르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본이 된다고 주장한다. 기억의 위기는 아카이브에 지당한 '존재이유raison d'être'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또한 역사에 있어 특정한 압력점에서만 일어난다(여기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논하기로 한다)
p. 110
보들레르에서 시작해 프루스트를 거치며 끊임없이 상상되었듯이 과거의 미술관이 시각 미술의 기억이 재생되는 장소였다면, 새로운 미술관은 비주얼로부터 기억을 분리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미술관의 기능은 거의 어디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전자 아카이브로 점차 넘어가고 있다. 그 동안 시각적 경험은 전시-형식뿐 아니라 스펙터클로서의 미술관-건물에 주어진다. 즉, 이미지는 미디어 속에서 브랜드의 형평성과 문화적 자산을 서비스한다는 명목으로 유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오늘날 공공 미술의 으뜸가는 형식일지도 모른다.
6장 미술사의 이율배반
p. 116
리글을 건축 역사학자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추종자들이 만든 질료적 결정론의 주장에 대항하여, 미학적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기술적 '숙련'의 근본적 본성을 주장했다면 리글의 '예술 의지'의 상대적 독립성을 주장했다. 7
pp. 127-128
전자 아카이브에서 주체의 자리가 모호하다면 그 사물의 목록tabulation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이 아카이브의 근본적인 작용은 특정한 사물뿐만 아니라 매체 전체를 이미지-텍스트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장소들이 정보-픽셀들로 바뀐다. 8
7장 극단론에 빠진 미술 비평가들
p. 154
그린버그가 후기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에 대해, 크라우스가 "정면성"에 대해, 혹은 프리드가 "광학성opticality"에 썼던 것처럼, 사람들은 형용사에서 명사가 되고, 묘사가 본질이 되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왜 이처럼 용어들을 실체화하는가? 다시,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러한 용어들은 외부로부터 공격당하고 내부로부터 침식되어 간 미학 영역을 위한 방파제로서 배치된 것이다. 외부의 적은 "키치", "연극성", 상품 문화 속의 일상생활이었다. 내부의 적은 미니멀리즘이 마련한 확장된 장arena이었다.
p. 161
나는 또한 우리의 상황이 대개 어떤 여파 속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 여파란, 우리가 모더니즘 회화와 조각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형식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의 항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 또 전전 아방가르드뿐만이 아니라 전후 네오 아방가르드의 항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에는, 승리에 젖은 우월감도, 절망도, 혹은 감상적인 우울함(적어도 우리는 이를 더 이상 병리학화시킬 필요가 없다)도 아닌 다른 반응들도 있다. 여기서 나는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러한 종말들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정말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분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메콘스Mekons가 189년 이후 사회주의의 사망에 대해 노래했듯이, 혹여 이런 장례식들이 엉뚱한 송장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닐는지? 9
p. 166
이 지점에서 나는 단지 "트라우마를 가진", "유령 같은", "비동시성의", 그리고 "조화롭지 못한"이라 표현할 만한 지속의 몇 가지 모습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Bruce Mau, Life Style
Robert Musil, The Man Without Qualities
Walter Benjamin "Paris, Capital of the Nineteenth Century"
헨리크 입센, 『대목수The Master Builder』
* 미래파의 구루guru
Timothy Leary "Turn in, turn on, drop out" (이 말 엄청 오랜만이다.)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 미술의 사회적 기초The Social Bases of Art(1936)
로버트 벤투리, 드니스 스코트 브라운, 스티븐 아이제노어.
알도 로시, 도시의 건축Architecture of the City(1966)
쿨하스, 하버드 디자인 스쿨의 쇼핑 가이드
*보들레르, 1846년의 살롱The Salon of 1846
*스태포드, 멋진 외모Good Looking, 1996
마리오 페르니올라Mario Perniola
푸코, 말과 사물
*리글의 후기저작, 기념비 숭배The Cult of Monuments(1903)
***3장 대목수는 다시 읽어볼 것. '건축', 게리와 매우 겹치고 있다. 건축가를 한명의 작가로 생각한다면 그 작가론을 쓰는 것에 참고해볼만하다. 클레어 비숍의 레디컬 뮤지엄 담론과 함께 견주어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그리고 이 3장은 "대단한 건물이 (테러의 표적이 되는 것을 불사하며) 조만간 여러분의 고향에도 하나쯤 세워질 듯하니." 이 문장으로 끝난다. 911테러가 2001년에 일어났고, 이 책이 2002년도에 발간되었다. 한 챕터를 하나의 문장으로 본다면, 이 문장은 엄청나게 큰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 이 부분 출처가 불명확해서 찾아볼 것. [본문으로]
- 🌞이 부분은 프루스트와 브들레르, 그리고 발레리와 마네를 비교하면서 미술관에 대한 생각을 진행한다. 다시 참고해볼 것. [본문으로]
- Theodor W. Adorno, Prisms, trans. Samuel and Shierry Weber (Cambridge: MIT Press, 1981), p. 177 [본문으로]
- 독일인 비평가는 아도르노를,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는 발레리를 칭한다(역주) [본문으로]
- 위의 책, p. 175 [본문으로]
- 위의 책, p. 179; Marcel Proust,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vol. 2 (Paris: Editions Gallimard): pp. 62-63. 이 미술관에 관한 짧은 통찰은 출발과 도착에 관한, 맥락의 해체와 재맥락화 그리고 습관과 기억에 끼치는 미술관의 영향에 관한 긴 사색의 와중에 나왔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다른 것들처럼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시대는 사물이 속한 환경에서만 사물을 보여주는 마니아로 인해 오염되었는데, 그럼으로써 본질적인 것, 즉 사물을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정신 행위를 억압하고 있다." [본문으로]
- 🌞젬퍼 책 좀 읽고 찾아볼 것... [본문으로]
- 미술관이 마주하고 있는 한 가지 위험은 이렇다: 미술관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저장고일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과 시선의 아카이브기도 하다. 그런데 그 관점과 시선이 정보로 변화하면서 평준화되어버릴 수 있다. [본문으로]
- 1976년에 결성된 영국 밴드. 선동적이고 강력한 펑크 음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