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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미셸 우엘백, 이세욱 역, 2009, 열린책들

✨소립자, 미셸 우엘백, 이세욱 역, 2009, 열린책들

Les Particules Elementaires, Michel Houellebecq, 1998

 

 

 

 

제1부 잃어버린 왕국

pp. 28-29

한 사람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만일 한 인생에 관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인생의 무상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라면, 굳이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예로부터 묘비에 새겨 온 것처럼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는 것만 밝혀 주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마르탱 세칼디의 경우에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을 상기시키면서 개인의 특성을 강조하기보다 사회의 변화 과정을 부각시키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 자신이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마르탱 세칼디처럼 <시대의 징후를 드러내는 개인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들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다. 당대의 역사적인 변화에 휩쓸린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는 점에서는 능동적이다. 그런 삶을 요약하는 데에는 한두 페이지 정도의 지면이면 충분하다.

 

p. 47

브뤼노는 또다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번에도 아이는 죽음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는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국어 숙제나 역사 작문을 잘해서 상을 받게 되면, 그것에 대해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곤 했다. 물론 그러고 나면 즉시 할머니가 돌아갔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죽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할머니의 대화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비록 갈수록 뜸해지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가 현대문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던 날에는 특히 이야기가 길었다. 그날 그는 자기가 받은 점수에 관해 할머니에게 이야기하리라 생각하면서 설탕에 절인 밤을 두 상자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공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교직에 임용되었을 때, 그는 자기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pp. 51-52

동물 사회는 거의 모두가 어떤 지배 체제를 바탕으로 운용된다. 이 지배 체제는 구성원들간에 힘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있고, 엄격한 위계 질서를 특징으로 삼고 있다. 집단 내에서 가장 힘이 센 수컷은 <알파 수컷>이라 불린다. 두 번째로 힘이 센 <베타 수컷>이 그 뒤를 잇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가장 힘이 약한 <오메가 수컷>까지 서열이 매겨진다. 힘이 세다 약하다 하는 것은 대개 결투라는 의식을 통해서 결정된다. 서열이 낮은 동물들은 서열이 높은 동물들에게 싸움을 걸어서 자기들의 지위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등급이 올라가고, 등급이 올라가면 몇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된다. 다른 구성원들보다 먹이를 먼저 먹을 수도 있고 집단 내의 암컷들과 교미를 할 수도 있다. 반면에, 가장 힘이 약한 동물은 복종의 자세(쭈그려 앉기, 항문 보이기 등)을 취함으로써 싸움을 피할 수 있다.

 

p. 59

브뤼노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엄청나게 행복했던 그 몇 초와 카롤린 예세얀이 가만히 손을 밀어냈던 그 순간순간을 두고두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소년 브뤼노의 마음속에는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체의 성적인 욕구에 앞서는 단순한 접촉의 욕구였다. 그저 상냥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욕구, 상냥한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였다. 다정함은 성적인 매력에 앞선다. 그래서 철저히 절망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p. 68

브뤼노는 어머니 집에 처음 머물 때부터 히피들이 자기를 받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잘생긴 동물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결코 되지 않을 것이었다. 밤이면 그는 열려 있는 음부들을 꿈에서 보았다. 그 무렵에 브뤼노는 카프카를 잃기 시작했다. 카프카를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살얼음이 깔리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심판을 잃었을 때는 다 읽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 뒤에도 멍하고 노곤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카프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 슬로 모션의 세계,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 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p. 75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십중팔구는 틀린 생각인데도 말이다. 

 

 

 

 

제2부 기이한 계기들

p. 131

미셸은 청소년기에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존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텔레비전이었다. 

 

p. 136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철저한 실증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잠재된 현실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고 관찰 가능한 것을 예측하는 수학적 형식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두 번째 가설 쪽으로 결집하였다.

 

p. 183

부성애란 허구이고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그것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쓸모가 있다. 변화가 실패로 돌아가면, 남는 건 거짓말에 대한 의식과 씁쓸한 뒷맛뿐이다. 

 

p. 255

두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가 그들 몸에 어떤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둘 다 똑같이 늙어 가고 있었다. 세월 그 자체가 파괴 작업을 벌여 그들의 세포와 세포 소기관이 지닌 복제 능력을 서서히 감퇴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제3부 감정의 무한

p. 321

어느 날 제르진스키가 그에게 말했다.

콩트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포함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증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어떤 형이상학이나 어떤 존재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콩트가 1924년에서 1927년에 사이에 닐스 보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엇다면, 그는 자신의 엄격한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을 것이고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했을 겁니다. 그런데 콩트는 개인적인 삶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고 사회적 상황의 실제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과정과 의식의 조류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지요. 게다가 그는 사랑의 감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해 보면, 그는 아마도 존재론을 다시 정의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에 반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렉과 체와 하드캐슬의 저작이 나온 뒤로 새로운 존재론이 확고한 틀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대상의 존재론이 상태의 존재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상태의 존재론만이 인간관계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는 소립자들이 식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어떤 <수(數)>를 통해서 그것들을 규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상태의 존재론에서 식별될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실체는 파동 함수와 이것을 매개로 해서 나타나는 상태 벡터뿐입니다. 이런 존재론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형제애와 연민과 사랑에 다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p. 325

허브체작이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제르진스키의 가장 큰 공적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넘어섰다는 것이 아니라(이 개념은 그의 시대에 이미 빛이 바래 있었고, 그것이 진보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양자 역학의 가설들에 대한 대담한 해석을 통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되살려 냈다는 점이다. 그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아나벨의 이미지를 한 번 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제르진스키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나벨을 통해서 사랑의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었다. 그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이론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를 이끌었던 것은 십중팔구 사랑에 대한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p. 339

역사는 존재한다. 역사는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조차 역사의 지배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가 아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만들어 낸 그 불운하지만 용감한 종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종은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결한 꿈이 있었다. 그 종은 모순덩어리였고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싸움을 좋아했고 이기심에 끝이 없었으며 때로는 가공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기 초월의 가능성을 예상하였고, 수년 뒤에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그들의 마지막 대표자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인류에게 이 마지막 경의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의도 언젠가는 잊혀지고 시간의 모래 속으로 사라져 가겠지만, 적어도 한번쯤은 이렇게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소립자에서 님포매니악까지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 

그리고 살짝 겹쳐지는 조르주 바타이유까지. 

 

-이 소설에서 화자가 오버랩되지 않는 여자이지만, 여러모로 느끼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뭔가 몇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글을 쓰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영장류이지만 결국엔 마침표, 말하자면 소립자로 끝나는.

 

*카프카의 심판 

올더스의 형인 줄리언 헉슬리, 내가 감히 생각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