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 윤원화, 2018, 보스토크프레스
서문 "삼차원의 세계를 ... 평평한 표면 위에 표현한 것"
p.36
결국 모든 이미지들은 (스스로 자율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들까지 포함해서) 현실의 일부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반영하는데, 그것은 다시 현실에 되먹임되면서 그런 현실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실제 있었던 일의 기록이 되기도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도안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는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여전히 이미지를 흉내 내서 또 다른 이미지들과 사물들, 인물들과 환경들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의 세기는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존재가 아님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이미지를 만드는 존재이며, 여기 없는 것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 이미지를 실현하고 스스로 그 이미지가 되려고 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1장 건축 도면, 건축물, 건축 사진
p.51
초기 사진 기술의 개발자들이 대부분 광학적 이미지를 고정해서 그림을 만드는 화가나 판화가의 문제와 씨름했던 데 반해, 과학자이자 논평자로서 아라고는 사진 기술을 새로운 문서 제작 기술로, 정보를 유의미하게 고정하고 처리하고 확산하는 기술적 혁신으로 이해했다. (『사진과 텍스트』책 참고할 것)
pp.62-63
어디서 무엇을 볼 것인가는 건축가에 의해 정해졌다. 그러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진가가 결정한다.
p.78
사진 이미지는 현실을 기록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한다. 지렛대처럼 현실에 힘을 작용하려고 해도, 그것을 지지할 받침점이 없다. 이것이 강홍구의 이미지를 떠다니게 만들고, 의미의 자리를 비워진 채로 놔둔다.
3장 역사의 이미지들
pp.130-132
다른 참고 자료 없이 이 사진만 보았을 때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것은 관습적인 건축물 사진이며 주체와 대상 양쪽 모두에서 관공서의 사진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이 이미지를 독해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텍스트 기반의 사진 읽기가 될 것이다. 이런 이미지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기억과 상상의 혼합물일 가능성이 높다.
p.135
...넓게 보면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를 각자의 또는 공통의 현재와 어떻게 관련지어 이해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그 시간은 우리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우리 발 밑에 어떤 시간의 지층에 깔려 있는지 질문한다. 서울시는 대체로 이 어려운 문제를 그냥 잘라내는 편을 택한다. 20세기의 흔적은 가난하고 힘없던 시절의 추문으로서 물리적으로 삭제되거나 의미가 탈취되고 장식적으로 재구성된다. 19세기 이전의 지역적 전통과 21세기 이후의 국제적 첨단을 동일 평면에 결합시키는 현재의 서울에서 근대 건축물의 전면은 차근차근 무의미로 수렴한다. 읽을 수도 없고 크게 시선을 끌지도 않는 얼굴을 여전히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5장 자연의 이미지들
p.206
지금 시점에서 그것은 대상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고 더 정확한 대상의 이미지를 소유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접근 불가능한 대상과의 거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어떤 사랑의 형태를 표상한다.
p.209
생리학과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눈의 위치를 능동적인 시각의 주체에서 점점 더 자동화된 시각적 작용의 객체로 이동시켰다. 눈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눈에 무언가 행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눈의 편에 설 수도 있고 눈을 향해 설 수도 있지만, 어느 쪽에서도 눈은 하나의 단독적인 시점을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공화된 자연으로서 이미 언제나 다른 것들과 연합한 상태로 발견된다.
*김시덕 『서울 선언: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