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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에 24번의 죽음, 로라 멀비, 이기형 이찬욱 역, 2007, 현실문화

1초에 24번의 죽음, 로라 멀비, 이기형 이찬욱 역, 2007, 현실문화

Death 24x a Second: Stillness and the Moving Image, 2006, Laura Mulvey

 

 

 

 

서문: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재현

p.12 

하지만 어떤 것은 물리적인 현존의 특징이나 흔적을 반드시 남기거나 남겨왔다. 그것이 보존된 지문의 '그때'처럼 지속하든지, 해시계 그림자의 '지금'처럼 지속하지 않든지 '대상은'은 시간의 특정 순간에 기호를 새긴다. 따라서 인덱스는 새김의 순간과 지속이라는 시간에 특권적인 관계를 가진다.

 

p.13

인덱스처럼 영화는 시간을 가로질러 리얼리티의 실제 이미지를 부득이하게 고착시킨다.

 

 

1. 흐르는 시간

p.27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이후' 그리고 '지금'의 변화하는 빛 속에서 인덱스적인 이미지의 '이전' 그리고 '그때'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거의 우연히 영화와 영화의 역사에 새로운 삶을 가져오면서 과거의 미학은 현재의 미학과 만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삶(영화는 새로운 소비 양식들을 부활시키고 회복시켰다)은 또한 오래된 영화의 소비 방식을 변화시킨다....이제 영사되는 영화가 가장 잘 지켜왔던 비밀인 영화의 정지성은 단순한 버튼 조작만으로도 쉽게 드러난다. 또한 그것은 정지된 프레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사진의 정지성을 드러내도록 해준다. 한편으로 영화 이전의 정지성은 사진의 자리에 위치한다. 그 이미지는 정지되어 있지만 필름처럼 인덱스적이다....영화 이후의 매체는 영화 이전의 매체를 불러냈다. 가장자리의 경계가 애매한 삼면 그림의 가운데 화폭처럼 영화는 앞과 뒤로 뻗는다. 그러나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융합 지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프리즈 프레임은 나이를 먹어가는 영화의 뒤쪽으로 죽음을 현존시킨다. 생명이 없는 스틸 이미지는 삶의 기호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인 움직임을 고갈시킨 것이다.

 

 

2. 불확실성: 주술 그리고 속임수의 예술

pp.46-47

     대중오락과 모던한 아방가르드로서 근대성의 표징이 되고자 했던 빅토리아 시대(1837년부터 1901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기) 사람들의 병적인 영혼 뒤쪽에 머물러 있던 것이 바로 영화였다. 물론 그들은 이와 같은 영화를 둘러싼 문화의 두 측면 모두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언캐니한 문화를 반복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그러나 20세기 대부분 동안, 영화는 또한 새로운 곳에도 위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영화가 불러냈던 유령들이 이제 그것에 사로잡힌 유령 같은 대중들을 뒤쪽는 바로 그 길 위였다.

     1919년 프로이트는 그의 <언캐니The Uncanny>라는 글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두 가지 정동을 구별한다. 첫째는 과거에 이미 죽은 자가 현재로 귀환할 지 모른다는 공포이며, 두 번째는 살아있는 주체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다가올 필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을 상상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이다. 프로이트는 귀신에 관한 믿음과 관련된 첫번째 문제가 계몽주의 이후에는 미신으로 간주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느꼈으나, 두 번째는 가장 계몽된 정신에서도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고 생가갰다. 비이성적인 것이 계속해서 이성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의 공포가 다른 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바로 사후 세계를 주장하는 종교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키울 수 있는 경우이다. 

 

 

4. 죽음 충동: 정지된 서사 운동

p.107

     프리즈 프레임 엔딩은 두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주로 서사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물질성과 연결된 것이다. 먼저, 프리즈 프레임은 서사에서 죽음 충동, 그리고 영화의 움직임으로부터 생명 없는 상태로의 급격한 변화 사이의 혼란을 재현한다. 이것은 은유의 장소이다. 두 번째로 프리즈 프레임은 움직임의 환영을 대체하는 정지의 환영을 창조하기 위해 동일한 프레임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 연속체 밖의 단일한 이미지 너머의 '사진'적인 존재에는 필름스트립의 흐름과 개별적인 프레임이 있다. 프리즈 프레임은 서사에 결말을 가져오는 반면에 플리커 영화에서는 패턴과 반복의 체계를 제시하며, 연속되는 개별 프레임은 무한을 뻗어나간다. 하나의 방향은 은유를 통해 '끝'을 표현하는 형식을 찾는다. 또 다른 방향은 끊임없는 환유,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한 결말을 재현한다. 

 

 

5. 알프레드 히치콕 <사이코>

p.123

     수많은 히치콕의 초기 영화 속에서 죽음의 스펙터클을 만드는 데 기여한 복잡한 배경과 바로크 연극적인 특성은 사라지고 오직 형식적인 목격자인 샤워기, 여자의 벗은 몸, 물과 피의 흐름, 그리고 바이올린의 금속성 마찰음만 남는다. 대중적인 구경거리로서 죽음의 느낌은 보다 추상적이고 영화적인 스펙터클에 의해서 대체된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몽타주 시퀀스montage sequence를 해석할 수 있는 관객만이 홀로 남겨진다.

[역주: 몽타주 편집은 1920년대 소비에트 실험 영화를 통해 등장했다. 몽타주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레프 쿨레쇼프였지만, 지금은 주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파업>과 <전함 포촘킨>, <10월>)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1920년대 에이젠슈테인은 자신의 영화들에서 영화 속으 모든 시각적인 기호에는 충동과 갈등이 존재해야 한다는 쿨레쇼프의 이론을 적용시켰다. 숏들을 병치시키면 그것들이 충돌하거나 갈등하게 되고, 이 충돌로부터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6.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

p.140

     '유예된 역사에 대한 생각, 삶에 도래하는 꿈, 현재에 부활된 과거', 이러한 굴착된 도시의 미이지들은 또한 시간을 혼란시키는 영화가 가진 유일한 능력을 설명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역사가 과거의 흔적들 속으로 물러가는 것처럼 그것들은 그들의 부재를 표시하는 세상과 시간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지만, 또한 옛날 옛적 한때 그들이 현존했던 리얼리티에 대한 증거를 산출한다. 영화와 함께 과거는 완전한 리얼리티의 모습으로 보존된다. 1952년에 할리우드 스타들만큼이나 익명의 작업가들의 살아있는 현존과 함께 화석화된 역사의 또 다른 층은 도시의 폐허 위에 이중 인화된다. 그때 그 장면에서 이러한 살아있는 것들은 폼페이 커플의 석고 틀처럼 그들의 스크린 이미지 속에서 화석화된 것으로서 지금 존재한다. 

 

p.158

     움직이고 있는 상태에서 얼려진 그 조각상들은 사진과 유사한 관계를 가지는데, 그것은 '그때' 인간 신체의 멈춰진 움직임을 '지금'으로 시간을 가로질러 보존하면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쿠마이는 지형학적이고 시간을 가로질러 존재한다. 선사 이래로 신성한 유적지는 그것이 본래 갖추고 있는 풍수지리의 특성들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장소 그 자체의 힘을 추가하는 또 다른 역사들의 층위들에 의하여 그 결과로서 그 위에 겹겹이 쌓이는 것이다. 그 조각상들이 마치 얼려진 시간의 스냅 사진, 순간들처럼 보이는 반면에, 쿠마이는 양피지다. 

 

p.162

     삶은 계속된다. 한쪽은 엔딩을 멈추고, 다른 쪽이 흐른다. 한쪽은 허구를 생산하면서 스타의 역할에 포커스가 맞춰진 일종의 집중이고, 다른 쪽은 또 다른 종류의 영화를 찾으면서 방랑하려는 영화의 경향, 즉 일종의 산만함이다. 자크 리베트에 따르면, 이것은 로셀리니의 스토리텔링 양식에서 본질적인 요소인 '시간의 영속'이다. 

 

 

7.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불확실성의 영화, 지연의 영화

pp.177-178

     영화의 미장아빔mise en abime구조는 리얼리티를 계속해서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러한 미학은 브레히트Brecht의 거리두기와 같은 계열의 리얼리즘이다. 

 

 

8. 지연의 영화

pp.190-191

    여하튼 컨텍스트로부터 추출된 영화 조각들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페티시적인 투자가 있는 반면, 이와 대비되어 보다 폭넓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조각을 추출하고, 이를 컨텍스트의 맥락으로 전치시키는 시네필리아들이 있어왔으며, 이제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 한쪽 끝에는 쾌락의 소유적인 관객이 있으며, 반대쪽에는 보다 명상적인 사색적 관객이 위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비늘처럼 겹쳐지는 둘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서로 침식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즉, 페티시적인 매혹과 지적 호기심이 격렬하게 뒤섞이는 개인적인 경계가 항상 존재한다. 

 

p.197

    영화에서 이러한 의미들의 미끄러짐은 단지 몇 초에 지나지 않으나 텍스트 분석과정에서 그것은 한없이 늘어나고 확장될 수 있다. 비디오를 정지시키고 재생하는 과정을 통해서 대상체가 지시하는 상황은 '기호학적인 가치'라는 수사를 극복하고 가시화된다. 기계에 의해 반복되고 회귀되는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가 지닌 의미의 반복과 공명하면서 스스로를 주장하며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학문적, 비평적인 실천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가 지닌 대체할 수 없는 시각적 쾌락과 보상,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되는 일시적 소유감, 컨텍스트와의 연관 등을 완성시키는 데 유용하다. 

 

 

9. 소유적인 관객

p.218

     <시각적인 쾌락과 서사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1975)에서 나는, 스펙터클의 매체로서 영화가 보이는 것에 관련하여 성적인 차이를 코드화하는 동안 또한 인간 얼굴과 인간 신체에 대한 매혹인 극도의 인간 중심적의 미학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코드화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특별히 명백했고, 그래서 스타 숭배 속으로 매우 깊이 투자되었다. 내가 주장했듯이, 여성 스타는 에로틱한 스펙터클로서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던 반면에, 남성 스타의 지배와 활약의 속성은 관객을 위한 시선이라는 점에서는 잠재적으로 수동적인 대상으로서 그의 노축에 대해 어떤 보충적인 것을 제공하였다....말하자면, '여성의 현존은 일반적인 서사 영화에서 필수불가결한 스펙터클의 요소이지만, 그녀의 시각적인 현존은 스토리의 전개에 대항하는 것으로 작동하며, 행동의 흐름을 에로틱한 명상의 순간 속으로 얼어붙게 하는 경향이 있다. 

 

p.230

     제임스 딘, 나탈리 우드, 살 미네오라는 세 명의 틴에이저를 <이유없는 반항Rebal without a Cause>(니콜라스 레이Nicolas Ray, 1955)에서 보았을 때, 그 전율은 다른 사람에게로 당겨진다. 이들 세 명 모두가 죽었음을 안다는 것, 그것은 도래했던 것이고 이미 발생된 것으로 프로이트가 언캐니의 실례로서 인용한 운명의 비이성적인 감각을 환기한다. 인덱스적인 언캐니를 걸쳐 결쳐진 것은 할리우드에서 또한 사실상 그 밖의 스타 시스템에서 사진적인 매체 그 자체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이러한 일상 바깥의 질서와 힘에 지배를 받는 과잉 결정된 삶의 감각인 그 밖의 언캐니함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환상은 그것이 이미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전기, 일화와 가십의 반리얼리티로 이동하듯이, 결국은 스토리의 디제시스적인 공간으로 물러나고 되돌아간다. 

 

pp.233-234

     영화의 거대한 아이콘은 죽음 이후에 그들의 완벽한 제스처들을 여전히 연기하고 다시 연기한다. 영화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행동 속에서, 그런 다음 그것을 운동과 생명으로 되돌리면서 소유적인 관객은 생명이 있는 것에서 생명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그 역으로부터 장기간 지속된 인간 신체의 변형이라는 매혹을 물려받는다. 이러한 관객은 움직이는 형상을 돌로 되돌리면서 그 또는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메두사를 응시하는 힘을 가진다. 움직임을 조종하고 완벽하게 형상을 고정시킨 후 조각적이고 포즈를 취한 그 과정은 역전될 수 있고, 그래서 메두사 효과는 피그말리온Pygmalion의 쾌락으로 변형된다. 

 

 

10. 사색적인 관객

p.246

     허구는 영화의 본질에 가면을 씌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허구는 영화 미학에서 빗나가지 않고 공헌하는 상상적인 시간의 층위들을 소개한다. 

 

 

 

 

     

  

 

 

 

 

 

 

 


 

*조르주 멜리어스, 사이코

*김형재 홍은주 디자인

* 조지 쿠커George Cuker, 스타 탄생 A Star Is Born,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