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잭 핼버스탬, 허원 역, 2024, 현실문화
Queer Art of Failure, Jack Halberstam, 2021
서문- 저급이론
p.17
이 책은 '저급 이론low theory'(스튜어트 홀의 연구에서 내가 차용한 용어다)과 대중적 지식을 사용해 대안을 탐구하고, 이원론의 전형적인 덫과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탐색한다. 저급 이론은 우리가 헤게모니의 덫에 걸리지 않고, 선물가게의 유혹에도 낚이지 않을 수 있게 해줄 모든 사이in-between 공간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저급 이론은 대안이 비판과 거부라는, 종종 극도로 어둡고 부정적인 반직관성이라는 혼탁한 영역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과 만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고급 이론과 저급 이론, 대중문화와 난해한 지식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삶과 예술, 실천과 이론, 사고와 행위 사이의 구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앎과 무지를 둘러싼 더 혼란스러운 영역을 끝까지 파헤쳐 볼 것이다.
p.33
규율은 자격을 부여하거나 박탈하고, 합법화하거나 비합법화하며, 보상하거나 처벌한다. 무엇보다 규율은 고정된 채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반대 의견을 억누른다. 푸코가 말했듯 "규율은 법률의 규칙이 아니라 정상화의 규칙을 정의한다." 1
pp.42-43
예속된 지식에 관한 내 세 번째 논지는 다음과 같다. 기념화 작업memorialization을 의심하라. 호모포비아나 인종주의에 관한 추모비를 새로 건립하는 일은 상식적인 듯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동시대의 많은 문학적, 이론적 논의가 기념화에 반대하고 있다. ... 기념화는 복잡한 역사(노예제, 홀로코스트, 전쟁 등과 같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 규율적 매커니즘이다. 푸코는 이를 "권력의 의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중요한 것(승리의 역사)을 선별해내고, 불화와 모순으로 가득한 역사에 하나의 연속적인 서사를 주입하고, 다른 '기념화' 작업을 위한 선례로 만든다. 이 책에서 망각은 영웅적이고 거대한 기억의 논리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며, 명백한 증거보다 유령성spectrality에, 유산보다는 잃어버린 계보에, 명문화보다는 삭제와 더 관련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억을 촉발시킬 것이다.
pp.42-43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것이 사소함, 실없음, 우스꽝스러움이라는 주제 아래 분류되지는 않지만, "실없는 대상의 대항정치학counter-politics"이라는 로런 벌랜트의 값진 구절에서 빌려온 '실없는 아카이브'는 고급문화 아카이브와 관련된 것과는 분명히 다른 대안을 요구한다. 이 책에서 내가 선호하는 텍스트들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거나 문화산업에서 해방시켜주지는 않지만, 존재와 행위, 인식 면에서 이상하고 반자본주의적인 논리를 제공할지도 모르며, 그 텍스트들은 은밀한 퀴어 세계와 공공연한 퀴어 세계를 모두 품을 것이다. 2
1장. 반란을 극화하기, 반락의 애니메이션
p.63
많은 퀴어가 회상하듯 아동기는 겸손함과 거북함, 한계, 그리고 캐스린 보드 스톡턴이 말한 "옆으로 자라기growing sideways" 등을 배우는 기나긴 수업과 같아. 3
pp.76-78
예컨데 동시대인의 욕망과 로맨스를 그리는 『뉴욕타임즈』의 인기 주간 칼럼인 '근대적 사랑Modern Love'에서 가장 인기 있는 꼭지 중 하나인 「행복한 결혼에 관해 고래가 가르쳐 준 것」에서 에이미 서덜랜드는 어떻게 동물원에서 배운 동물 조련 기술을 집에서 남편에게 적용했는지 설명한다. 그 칼럼은 포스트모던시대의 연인들이 근대적 사랑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는 게 목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성인들을 위한 이성애 지침서에 가깝다. ....서덜랜드는 '근대적 사랑'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근대적 결혼이 각자가 파트너의 약점과 별난 점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결코 구조를 문제 삼지 않고,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서로 붙어 있음으로써 승리를 확인하는 식으로 행하는, 동시적 진화를 위한 훈련이라고 글을 맺는다. 4
pp.112-113
애니메이션을 냉소적으로 독해하는 일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돌아오기 쉽다. 즉, 까다로운 주제가 어린이용 영화에서 제기되는 까닭은 그것이 다른 곳에서 논의될 필요가 없도록, 그리고 반란의 정치학이 미성숙하고, 전오이디푸스적이고, 유치하고, 바보 같으며, 환상에 가깝고, 실패에 기반하는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장. 야, 내 팔루스 봤냐? - 잊기, 읽기, 반복하기
pp.158-159
〈첫 키스만 50번째〉 역시 여주인공이 오늘의 구애자 남성을 다음날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평범하게 진행되지 않는 이성애 로맨스 드라마에 기대고 있다. ... 아버지와 오빠의 보호막에 둘러싸여 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루시에게는 일종의 매력과 천진난만함이 있으며, 새로운 시작은 그녀에게 무구함과 순진함을 부여한다. 이는 헨리가 이 반복 순환에 개입하도록 부추겨 그의 욕망 또한 연루시키는데, 헨리는 자신에 대한 루시의 관심을 이용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게 한다. 이 새로운 반복 순환은 루시의 생래적 가족의 정체를 새로운 핵가족의 역동이라 추정되는 것으로 대체한다. 이로써 아버지의 시간은 추방되고 그 자리에 결혼과 남편 및 아이들의 시간이 놓일 것이다. 새로운 미래는 낡은 과거와 아주 비슷해 보이는데, 여성이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이동하면서 새 삶을 시작한다는 모든 로맨스 코미디의 이성애적 장치가 잘못된 믿음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p.173
학습은 사실상 암기인 한편 망각이고, 축적인 한편 삭제이기도 하다.
p.178
데리다는 「아카이브 열병」이라는 글에서 죽음충동을 망각과 연결하여 죽음충동이 "침묵 속에서 작동하고, 결코 그 아카이브를 남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망각이라는 무정부주의적 공간 혹은 죽음이라는 반anti-아카이브는 아카이브 열병을 추동하는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말 그대로) 보수적 잠재력과 혁명적 잠재력을 모두 가진 기억에의 의지다. 아카이브 열병은 가장 전통적인 형태일 때 "근본악radical evil"에 가깝다. 5 다음의 세 장에서는 퀴어성과 여성성, 페미니즘을 실패, 상실, 좌절, 기억, 망각이 상기시키는 근본악에 연결해보려 한다. 6
3장. 실패의 퀴어 예술
p.202
검열되었던 사진집을 1970년대에 출판하면서 쓴 서문에서 그는 "파리의 밤에 자신을 매혹한 모든 것을 번역"하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항상 사진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7
4장. 그림자 페미니즘 - 퀴어 부정성과 급진적 수동성
p.249
유토피아는 언제나 실망과 실패를 동반해왔다.
- 사이디야 하트먼,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p.266
명백히 자기 어머니의 상실과 그 후로 소설에서 이어지는 어머니의 자서전은 식민주의의 맥락 내 기원의 상실과 그에 뒤따르는 목적인telos의 상실에 관한 알레고리적 이야기다. 그러나 화자인 수엘라 클로뎃 리처드슨은 향수에 젖어 잃어버린 기원을 찾으려 하거나 결의에 차 자신만의 목적인을 창조하려 하는 대신, 시작과 끝이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 비존재unbeing의 형태를 자처한다. 과거를 갖지 못하므로 그로부터 배울 것도 없고, 미래도 상상할 수 없으며,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의 언어, 논리, 정체성에 완전히 점유당한 현재 시제만을 갖는 피식민 자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식민지 이야기의 일부가 되거나, 아니면 그 어떤 이야기의 일부도 되지 않는 것. 수엘라는 후자를 택한다.
5장. '내 안의 킬러는 네 안의 킬러' - 동성애와 파시즘
pp.344-345
결론
동성애와 나치즘 간의 상상된 관계와 실제 관계에 대한 논쟁적인 사례를 이용해 나는 번역적이게도(정치적으로 순수한 동성애의 역사를 배반한다는 면에서), 동성애를 나치에서 완전히 떼어내려는 욕망과 그 둘을 관련짓는 모든 시도를 동성애 혐오로 치부하려는 욕망은 동성애자 역사의 다층성을 오독하고 동성애의 기능을 단순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불성실한 역사 기술에서 동성애는 정치학, 성애, 권력과 일련의 유동적인 관계를 이루며 장기간 지속되는 정체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유동적인 관계의 복잡성을 포착하려면 급진적 욕망과 급진적 정치학을 선형적으로 연관지을 수 없으며, 우리는 역사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정치적으로 문제적인 연관관계로 인해 혼란스러워질 준비를 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멍청함을 다루고, 퀴어한 망각을 가지고 헤게모니적 기억의 양태에 대한하며, 여성의 마조히즘과 동성애자의 배반이라는 주제를 살피며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실패의 의미를 숙고해보았다.
6장. 실패에 생기를 불어넣기 - 끝내기, 도망가기, 살아남기
p.357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시간 소모가 크고, 기술적 난이도가 높으며, 정교한 활동이다. 각 숏마다 인물이나 모형 혹은 소도구를 미세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스톱모션이나 클레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한 번에 한 프레임씩 만들어진다. 움직임은, 움직이는 대상에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숏과 다른 숏의 관계에 의해 암시된다.
p.373
산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고, 망치는 것이며, 실망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로 죽는 것이다. 퀴어한 실패의 기술은 죽음과 실망을 우회하는 길을 찾기보다,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부조리한 것, 유치한 것, 가망 없는 멍청함을 포용한다. 끝과 한계에 저항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피할 수 없는 모든 판타스틱한 실패를 오히려 꼭 붙들고 즐겨보는 게 어떨까.
+ 빠올로 비르노, 다중, 김상운 옮김 (갈무리, 2004)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다중, 정남영 외 옮김 (세종, 2008)
토니 모리슨, 빌리버드, 최인자 옮김 (문학동네, 2014)
- 이전에 보스턴에서 지낼 때 GSD Public Lecture를 들었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강연을 하셨다.
이 책 역시도 (어느정도 기간이 지났지만) 그 강연을 떠올리게끔 한다.
- Focu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2003, p.38: [국역본]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난장, 2015) [본문으로]
- Lauren Berlant, The Queer of America Goes to Washington City,1997, p. 2. [본문으로]
- [옮긴이] 스톡턴(Kathryn Bond Stockton)은 The Queer Child or Growing Sideways in the Twentieth Centur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9)에서 몸집이 다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 낳는 식의 선형적이고 일반적인 의미의 성장(growing 'up') 개념에 맞서 이상한 머뭇거림, 가시밭길, 생산성 없는 지연 등을 포함하는 변칙적인 성장을 가리켜 옆으로 자라기라는 말을 고안했다. [본문으로]
- Amy Sutherland, "What Shamu Taught Me about a Happy Marriage," New York Times, 25 June 2006. [본문으로]
- Jacque Derrida, Archive Fever, 1998, p. 10. [본문으로]
- 같은 책, p. 20. [본문으로]
- Brassai, The Secret Paris of the 1930's, 1976, n.p.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