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문턱: 사진에 관한 에세이,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남시 역, 2022, 열화당
The Past's Threshold: Essays on Photography, Siegfried Kracauer, 2014, Diaphanes
필리프 데스푸아, 사진 매체 사상가로서의 크라카우어
p.11
크라카우어가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예술사진이 아니라 신문에 실린 통속적인 사진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를 통해 강조되는 건 혼종적인 재생산 형식이라는 이 매체의 근본 특징이다. 스타의 초상은 그 복제의 상호매게적(intermedial) 사슬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별적인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영화 촬영, 세트 사진, 르포르타주 사진과 복사본 인화를 서로 연결하는 이 복제의 사슬 속에서 스타의 초상은 단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어가 접근하는 사진은 무엇보다 대중문화의 주요한 토대를 형성하고 그 라이트모티프를 퍼뜨리는 대중문화의 벡터로서의 사진이다.
p.22
이 아카이브 사진들은 우리에게 크라카우어라는 인물도, 그의 전기도 계시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보존되었다는 우연과 그 불완전한 상태 덕에 이 사진들은 이십세기를 여행하며 생겨난 이질적 일화들의 목격담을 담고 있다.
사진
pp.26-27
할머니가 소멸된 뒤 장식만 남은 옷을 매개로 손자들은 흘러간 시간의 순간,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의 순간을 들여다보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미소나 쪽 찐 머리와는 달리 시간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데도 손자들에게 사진은 시간의 표현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사진이 미소나 쪽 찐 머리 같은 디테일들에 지속에 선사했던 반면, 이 디테일들은 저 단순한 시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이들로부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pp.28-29
기억은 한 사태의 총체적 공간현상이나 총체적 시간 경과와 무관하다. 사진에 비하면 기억의 기록에는 구멍이 많다. ... [기억의] 장면들이 조직되는 원리는 사진의 원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진이 주어진 것을 공간적 (혹은 시간적) 연속으로 포착한다면 기억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한 보존한다. [기억에서] 그것의 의미는 공간적 혹은 시간적 맥락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의] 장면들은 사진의 재현과는 서로 어긋난다. 사진적 재현의 입장에서 기억 이미지들은 파편으로만 보이고(기억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고, 그를 향하고 있어 기억 이미지의 파편화를 막아 주는 의미를 포괄하지 않기에) 기억 이미지의 입장에서 사진은 불필요한 잉여들이 뒤섞여 있는 혼합물로 보인다.
기억 이미지의 의미는 그 이미지의 진리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규제되지 않은 충동에 연루됐다면 기억 이미지에는 악마적 모호성이 내재한다. 그건 희미한 빛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우유 잔처럼 불투명하다 인식이 영혼의 성장에 빛을 비추고 자연적 강박을 제어하면 그 투명성이 높아진다.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충동의 마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해방된 인식뿐이다. 이 의식이 떠올리는 특징은 참되다고 인식된 것과 관계한다. 참되다고 인식된 것은 그 특징들 속에서 드러나거나 아니면 그 특징들로 인해 억제될 수도 있다. [참되다고 인식된] 그런 특징들을 찾을 수 있는 이미지야말로 다른 모든 기억 이미지들보다 탁월하다. 이 이미지는 모호한 회상이 아니라 참되다고 인식된 내용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 이미지들은 마땅히 최후의 미이지라 말해야 할 이 이미지로 축소되어야 한다. 이 이미지 속에서만 망각되지 않는 것이 지속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최후의 이미지는 그의 고유한 ‘역사’다. 해방된 의식이 인식한 진리와 의미심장하게 결부되지 않은 모든 특성과 규정들은 이 역사에서 떨어져 나간다. ... 역사는 그 이름을 하나의 선으로 압축하는 모노그램과 같다. 거기서 그 선은 장식의 의미를 갖는다.
p.33
살아 있음을 요구받는 최근의 과거는 그 의미가 변해 버린 더 오랜 과거보다 노쇠하다. 사진 속 할머니의 의상은 자신의 존속을 주장하고 싶어 하나, 내동댕이쳐진 잔여물로 인식된다. ... 오래된 사진에서는 풍경도, 다른 모든 대상도 의상이다. 그 이미지에서 보존되는 건 해방된 의식이 일찌감치 자리를 뜬 연관들이며, 인정하려 하지는 않지만 쪼그라든 사물들이다. 의식이 자연적 구속에서 더 많이 벗어날수록 자연은 더 감소한다.
p.34
사진이 보여주는 건 원본의 인식이 아니라 한순간의 공간적 배열이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건 한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서 제거될 것의 총합이다. 사진은 그 인간을 모사함으로써 그를 무화한다. 사진과 인간이 하나가 되엇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p.36
모든 나라의 화보신문이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미국의 화보신문은 세계를 사진의 총체와 동일시한다. 이는 이유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세계 자체가 ‘사진 찍힐 만한 얼굴’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스냅사진을 낳는 공간적 연속체에 통합되려 애쓰는 탓에 세계는 사진 찍힐 수 있는 것이다. 카메라 플래시가 한 대상을 비추는 몇백 분의 일 초에, 스포츠맨이 화보신문과 계약을 체결하고 사진가들이 그를 촬영할 만큼 유명해지느냐 아니냐가 달려 있다. 아름다운 소녀와 젊은 남자의 모습도 카메라 포착될 수 있다. 사진이 세계를 먹어 치우고 있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신호다. 사진은, 모든 기억 이미지에 동반하는 죽음에 대한 기억을, 사진을 축적함으로써 추방하고 싶어 한다. 화보신문에서 세계는 사진 찍을 수 있는 현재가 되고, 사진 찍힌 현재는 몽땅 불멸이 된다. 그 세계는 죽음에서 벗어난 듯 보이나 실제로는 죽음에 내맡겨진 것이다.
p.38
사진에 등장하는 텅 빈 자연은 자본주의가 산출한 사회의 현실 속에서 한껏 발양된다. 그 침묵이 얼마나 추상적이건 간에, 우리는 말 못하는 자연에 완전히 빠져든 사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사회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사회의 윤곽이 떠오르는 곳이 화보신문이다. 이런 사회가 지속된다면 의식 해방의 결과는 의식의 제거일 것이다. 의식에 의해 포착되지 못한 자연이 의식을 떠나 버린 책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만약 이런 사회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해방된 의식에게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전례 없이 자연과 섞이지 않은 상태이기에, 의식이 자연에 대해 자신의 힘을 입증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의 전환은 역사가 모든 판돈을 건 도박 행위다.
사진 속 베를린
p.53
티어가르텐에서 찍은 이미지들은 특히 성공적이다. 그 이미지들은 바닥에 쌓인 낙엽보다 높지 않게 뻗어 들어가 하늘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물웅덩이 같은, 티어가르텐의 실종된 요소를 드러내 보인다. 이를 통해 교외의 자연과는 거리를 두고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이라는 내부적 성격이 강조된다. 현재로부터 차단된 채, 티어가르텐은 이미 과거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티어가르텐은 그 자체로 사진의 비유로 작동한다. 사진이 이렇게 수월하게 티어가르텐을 좇을 수 있던 것은 사진도 마찬가지로 어제의 문턱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진페르트, 사진으로 된 이력서
p.88
뉴욕 1945-1966
이 이미지의 요소들과 구도로 보건대 사진을 찍은 릴리 크라카우어가 작가를 재현하는 스투디올로(Studiolo) 모티프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p.94
후기
1966년 11월 크라카우어가 뉴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는 미완성이었다. 그이 편지에는 끝내지 못한 작업에 대한 언급이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와 릴리는 파리에서 가지고 온 분류되지 않은 각종 문서들을 정리했어. 우리는 말 그대로 압도되어 버렸지. 그러니까 재방문한 과거(the past revisited), 재획득한 시간(le temps retrouvé)에 말이야. ... 중요한 건 서류 더미 속 편지들을 읽으며 과거를 둘러보다 회고록을 써야겠다는 거역하기 힘든 욕망이 생겼다는 거야. 진정 장엄한 문체의 회고록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내가 절대 감당할 수 없을 사치겠지.” 2
- 스투디올로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서재’로, 주로 독서나 공부, 글쓰기를 하는 공간을 말한다. 십오세기 이래 예술가, 성직자, 지식인들이 스투디올로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하나의 모티프로 자리잡는다. - 옮긴이 [본문으로]
- T.W.Adorno, S. Kracauer, Briefwechsel 1923-1966, ed. Wolfgang Schopf, iconographical document 2, Frankfurt am Mian: Suhrkamp, 2008, p.449. 1950년 10월 1일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 ‘재방문한 고거’는 영어로, ‘재획득한 시간’은 프랑스어로 적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