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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일곱 등불, 존 러스킨, 현미정 역, 2012, 마로니에북스

건축의 일곱 등불, 존 러스킨, 현미정 역, 2012, 마로니에북스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1849, John Luskin (1819-1900)

 

 

 

 

1849년 초판 서문

p. 7

...나의 의견에 확신이 있다면 신중하지 못한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 건축 체계가 불확실성과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있더라도 분명한 의견을 개진한다면 그것은 모래 제방에 피는 잡초처럼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 희생의 등불 The Lamp of Scrifice

p. 21

1. 건축은 인간이 세운 구조체edifice를 배열하고 장식하는 예술로서, 사용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2. 진실의 등불 The Lamp of Truth

pp. 51-52

6. 건축적 사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거짓된 구조나 지지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후기 고딕의 지붕에 달려 있는 펜던트 같은 것이 그 예다.

2) 표면을 칠해서(목재를 대리석처럼) 본래의 재료와 다른 재료를 재현하거나, 평면의 그림을 입체의 조각처럼 보이도록 거짓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3) 어떤 종류이건 주형으로 뜨거나 기계로 생산한 장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p. 87

이렇게 중세 건축의 위대한 왕조는 막을 내렸다(각주/ 이 압축된 문장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불행히도 난센스다. 진실의 결핍은 일부였을 뿐, 결코 일반적인 질병이 될 만큼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있을 법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이 모두 음지에 모여 후기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과 화합하고 즉각 모든 분야를 부패시키는데, 예술은 그 대표자가 된다) 이는 자신이 가진 힘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질서, 일관성, 체제를 위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건축은 압도적인 개혁의 물살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는 모두 하나뿐인 진실을 희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시하자. 

 

 

3. 힘의 등불 The Lamp of Power

p. 89 

1. 인간의 노동에서 받은 감동들을 회상할 때, 아주 선명한 것이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는 모두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많은 것들이 이상하리만큼 또렷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기억나거나, 판단을 유보했던 특징들이 망각의 강 저편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단단한 바위의 암맥처럼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결빙과 해동의 운행으로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p. 105

...건축가에게 빛은 순식간에 조율되지 않은 강렬한 땡볕이 되어 딱딱한 표면 위로 쏟아질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숭고를 위한 최고의 수단은 바로 확실한 그림자다. 이런 까닭에 크기와 무게 다음으로, 건축의 힘은 그림자의 양(공간으로 측정되건 집중도로 측정되건)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보건대 이 그림자의 실제적인 역할, 즉 인간의 일상에서 그것의 용도와 영향력은 (휴식과 기끔을 주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예술의 역할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인간적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4. 아름다움의 등불 The Lamp of Beauty

p. 129 

아포리즘 19. 모든 아룸다움에는 자연 형태의 법칙에 기초한다. 

 

p. 138

회화에서건 조각에서건 고상한 휘장은 모두(색과 질감은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움직임과 중력의 표현이다. 휘장은 예나 지금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며, 그 운동에 저항하는 중력의 힘을 눈앞에 제시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p. 161

아포리즘 21. 대칭은 추상이 아니다. 

 

p. 164

아포리즘 22. 완벽한 조각은 가장 순수한 건축의 일부이어야 한다. 

 

p. 164

34. 이러한 제약 하에서 나는 완벽한 조각이 가장 순수한 건축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완벽성을 말하는 것은 위험의 소지가 있고,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왜냐면 건축자가 모방하는 일에 몰두하는 순간, 장식의 의무 즉 구성의 일부로서의 역할을 망각하고, 정교한 조각의 기쁨에 도취되어 음영과 그 효과를 제물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실패하는 것이다. 그의 건축은 정교한 조각품을 전시하기 위한 단순한 액자 자나지 않게 된다...그러므로 젊은 건축가들은 모방 장식을 언어로 치자면 극존칭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다. 

 

 

 

5. 생명의 등불 The Lamp of Life

pp. 221-222

이 에세이 초반에 나는 수작업은 항상 기계작업과 구별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를 기계로 강등시켜 자신의 노동을 기계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일을 하는 한, 즉 그들이 하는 일에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한 그들이 무능한 장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솜씨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pp. 227-228

족히 몽상적이고, 족히 세속적이고 그리고 족히 감각적인 것이 인간 존재 안에 있다. 그것이 타오르는 몇 안 되는 순간을 기계 안으로 던져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기껏해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증기에 불과하다. 그 증기가 적어도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도록 하자. 폭발하는 용광로와 구르는 수레바퀴를 조용히 덮어버리는 짙은 어둠이 아닌. 

 

 

6. 기억의 등불 The Lamp of Life

p. 231

인간의 망각을 거부하는 강한 정복하는 오로지 둘뿐이기 때문이다. 시와 건축. 건축은 어떤 면에서 시를 포함하며, 현실적으로 더 강력하다. 건축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생애 동안 그들의 손이 다루고 그들의 힘이 만든 것, 그들의 눈이 포착한 것을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아포리즘 27  건축이 곧 역사가 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한다. 

 

p. 241

...우리는 그 시간을 건설해야 한다.

 

p. 243

12. 어쨌거나 특별한 성질로 인하여 픽쳐레스크는 보다 높은 예술분과에 속하는 주제가 될 수 없다(이것이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현재 우리의 목적이 필요한 전부다). 그 성질을 간략하게 한마디로 표현하면, 픽쳐레스크는 그 의미상 기생적 숭고Parasitical Sublimity다. 

 

pp. 248-249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있어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조판이 인상깊었다. 80년도에 2판이 나오면서 러스킨이 추가적으로 단 각주는 본문에 배치하고, 역주는 뒤에 배치를 하면서 아포리즘과 크게 부딧힐 일이 없어서 지면 상에서 모든 요소들이 충돌하지 않았다. 특히나 볼드체일 때 문장부호 글리프는 유난히 더 뚱뚱해졌는데, 그 부분이 19세기 문체(어쩌면 존 러스킨의 문체일 수도 있겠지만)와 등불이라는 선언적인 소제목들과 어울렸다. 

 

*1800년대 글로 넘어가게 되면 문체가 살짝씩 다르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아포리즘이 본문에 나무 옹이처럼 있었다.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