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김호영 역, 2019, 문학동네
Espèces d'dspaces, Georges Perec, 1974/2000
페이지 La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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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7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들처럼 해안을 항구들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 1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2
침대 Le L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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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7
- 다음을 읽을 것: V. 플루서, 「침대에 대하여」, 『코즈 코뮌』, 2편, 제5호, 1973, 21-27쪽.
방 La Cham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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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6
평온하고도 소소한 생각 1번
그 어떤 고양이 주인이라도, 당연히 고양이가 인간보다 집에서 훨씬 더 잘 산다고 말할 것이다. 가장 심하게 각이 진 공간들에서조차, 고양이들은 적절히 후미진 구석을 찾아낼 줄 안다.
평온하고도 소소한 생각 2번
흘러가는 시간(나의 역사)은 잔재들을 남겨 쌓이게 한다. 사진들, 그림들, 오래전부터 말라붙어 있는 사인펜 몸통들, 셔츠들, 잃어버린 유리잔들과 잠시 맡아둔 유리잔들, 시가 포장들, 상자들, 고무지우개들, 우편엽서들, 책들, 먼지, 그리고 하찮은 골동품들, 이것이 바로 내가 나의 자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아파트 L'appar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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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2
나는 기능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보기에 어쨌든 오늘날 아파트의 전형적인 분할에서, 기능은 단일한 목적을 갖고 있고, 연속적이며, 생리적 리듬을 고려하는 방식에 따라 작동한다. 즉 일상적인 활동들에 상응하는 시간대들이 있고, 각 시간대에 상응하는 아파트 방들 중 하나가 있다. 3
4
pp. 57-58
쓸모없는 공간에 관하여
나는 쓸모없는 방 하나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쓸모없는 방 하나가 있는 아파트를 생각해보려 몇 번인가 애쓴 적이 있다. 그것은 광이 아니었을 테고 보조실도, 복도도, 골방도, 구석방도 아니었을 것이다. 기능이 없는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아무쪽에도 쓸모없고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곳이었는지 모른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런 생각, 이런 이미지를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내가 보기에, 이 아무것도 아닌 곳, 이 빈 곳을 묘사하기에는 언어 자체가 부적격인 것으로 드러났다. 마치 우리가 가득찬 것, 유용한 것, 기능적인 것데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기능 없는 공간. '분명한 기능이 없는' 곳이 아니라, 분명 기능이 없는 곳. 복합 기능적인 곳(이런 공간은 누구나 만들 줄 안다)이 아니라, 기능이 결여된 곳. 물론 이것은 단지 다른 공간들(창고, 벽장, 옷장, 장롱 등)을 '해방시켜 줄' 용도로 마련된 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며, 반복해 말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5
p. 66
벽
"벽이 생긴다면, 그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장 타르디외
나는 벽에 그림 하나를 건다. 그런 다음 벽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더이상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벽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며, 이 벽이 벽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벽이란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더이상 내 아파트에 벽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벽들이 없다면 아파트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벽은 더이상 내가 살고 있는 장소를 규정하고 경계짓는 것이 아니며, 나의 장소와 타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장소들을 분리해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림을 위한 하나의 받침대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그림도 잊어버리고, 더이상 바라보지 않으며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된다. 나는 벽이 있다는 것을 잊기 위해 벽에 그림을 걸었지만, 벽을 잊으면서 그림 또한 잊는다. 벽이 있기 때문에 그림이 있는 것이다. 벽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있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보다 더 나은 것을 차지 못했다. 그림은 벽을 지운다. 하지만 벽은 그림을 죽인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벽을 바꾸든가 그림을 바꿔야 하며, 벽들마다 끊임없이 다른 그림들을 걸든가 혹은 항상 벽을 바꿔 그림을 걸어야 한다.
거리 La rue
3
p. 84
거의 어리석을 정도로,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한다. 흥미롭지 않은 것, 가장 분명한 것, 가장 평범한 것,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하기.
구역 Le Quartier
2
p. 97
왜 분산을 중요시하지 않을까? 단 하나의 장소에 살면서 그곳에 자신의 모든 걸 모으려 헛되이 애쓰는 대신, 왜 방을 다섯 개나 여섯 개로 파리 안에 분산시키지 않았을까 나는 당페르에 잠을 자러 갈 수도 있고, 볼테르 광장에서 글을 쓸 수도 있으며, 클리시 광장에서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푀플리에 비밀문에서 사랑을 나눌 수도 있으며, 통브이수아르거리에서는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몽소공원 근처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요컨대 이것이 모든 가구상을 포브르생투안지구에 모으고, 모든 유리상을 파라디거리에, 모든 재단사를 상티에거리에, 모든 유대인을 로지에 거리에, 모든 학생을 라탱지구에, 모든 출판인을 생쉴피스지구에, 모든 의사를 할리스트리트에, 모든 흑인을 할렘에 모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인 걸까?
도시 La Ville
1
p. 101
교외 지역들이 교외로 남지 않으려는 강한 경향을 띤다는 것을 인지할 것.
시골 La Campagne
1
p. 113
나는 시골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영일 뿐인다.
내 동료들 대다수에게, 시골은 그들의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장식 같은 공간이다. 금요일 저녁 그들이 별장을 찾아갈 때 이용하는 고속도로의 한 부분과 경계를 이루는 공간이자, 일요일 오후 자연으로의 복귀를 예찬하면서 남은 주간 동안 버텨야 할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기운을 내어 몇 미터 정도 지나가보는 공간이다.
3
p. 118
움직임에 관하여
오래전에 우리는 이동하는 습관을, 우리가 그 일로 고통받지 않도록 자유롭게 이동하는 습관을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있던 곳에 남았다. 사물들도 그것들이 있던 그대로 남았다. 우리는 왜 거기였고 다른 곳이 아니었는지, 왜 그와 같았고 다른 식이 아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물론 너무 늦어버렸고, 길들여져버렸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이전만큼 잘 지냈다.
공간 L'Espace
pp. 135-136
아무것에도 시야가 막혀 있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시선은 아주 멀리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시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우리의 시선은 그것이 마주하는 것만을 본다. 공간, 그것은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이고, 시선이 그 위에 둑을 만드는 것이다. 장애물이며, 벽돌들이자, 각이고, 소실점이다. 공간, 그것은 시선이 하나의 각을 만들 때, 멈춰설 때, 다시 출발하기 위해 회전해야만 할 때 발생한다. 공간, 그것은 외부원형질적인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공간은 가장자리를 지니고,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지도 않으며, 철도 레일들이 무한대에 이르기 훨씬 전에 만나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것을 행한다.
pp. 152-153
공간(이어서 그리고 끝)
나는 안정되고 고정되고, 범할 수 없고, 손대지 않았고 또 거의 손댈 수 없고, 변함없고, 뿌리깊은 장소들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기준이자 출발점이자 원천이 될 수 있는 장소들:
나의 고향, 내 가족의 요람, 내가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집, 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는(내가 태어난 날 아버지가 심었을지도 모르는) 나무, 온전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는 내 어린 시절의 다락방......
이런 장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공간은 질문이 되고, 더는 명백한 것이 못 되며, 더는 통합되지 않고, 더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공간은 하나의 의심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곳을 기록해야 하고 가리켜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아니며,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적이 없지만, 나는 그곳을 정복해야만 한다.
나의 공간들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이 그것들을 마모시킬 것이며 그것들을 파괴할 것이다. 어떤 것도 그전에 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고, 내 기억들은 나를 배반할 것이며, 망각이 내 기억 속에 침투할 것이고, 나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가장자리가 다 해지고 색이 바랜 사진들을 쳐다볼 것이다...
공간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진다. 시간은 공간을 데려가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내게 남겨놓는다:
글쓰기: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무엇가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기. 점점 깊어지는 공허로부터 몇몇 분명한 조각들을 끄집어내기, 어딘가에 하나의 흠, 하나의 흔적, 하나의 표시, 또는 몇 개의 기호들을 남기기.
-조르주 페렉 생전에 출간한 유일한 산문집.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의 청탁으로 나오게 된 책이다.
-디자인: 슬기와 민, 인진성
*La page 는 '조해나 드러커,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 최슬기 역, 작업실 유령'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