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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큘로OKULO 007: 풍경, 2018, 미디어버스

오큘로OKULO 007: 풍경, 2018, 미디어버스

 

 

 

 

 

풍경은 넘치지만 현실은 희박하다: 풍경 이미지의 정치적 퇴행 / 서동진

p. 11

영상 작업을 하는 시각 예술 분야 작가들에게서 역사적 시간을 재현하는 작법으로 풍경에 의지하는 경향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박찬경의 <시민의 숲>은 아예 풍경 이미지 자체를 역사적 시간의 도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제안한다. 

 

p. 13-14

세월호 참사 2년 뒤인 2016년 경기도 미술관은 "세월호 희생자 추념전"으로 사월의 동행이란 전시를 진행하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인 4월 16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에서 우리는 세월호 사태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기억하고 제시하려는 여러 시각예술 작업의 사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풍경 이미지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전수현의 단채널 비디오 <대화>는 팽목항 건너편의 바다를 긴 시간에 걸쳐 제시한다. 그것은 고요하고 심지어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바다의 풍경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관객은 이러한 한가롭고 평화로운 바다 풍경의 잔인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비디오에서 등장하는 풍경은 더이상 사실이나 외적 세계에 대한 기록이나 지표적인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어떤 의미의 사슬 속에 자리하도록 하려는 노력의 좌절을 가리킬 뿐이다. 그것은 재현할 수 없는 대상과 사건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일러준다(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를 비명처럼 중얼거리거나 "안 돼!"라고 들리지 않는 외침을 토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호와 그것에 인접한 혹은 연계된 풍경 이미지의 연쇄는 바로 그런 총체화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으로서 효과를 발휘한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서 구실하지 못하는 사건, 즉 외상적 사건의 화신이 된다. 

 

p. 18

그렇다면 풍경에 거는 미학적, 정치적 기대는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어떻게 분기하는 것일까.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구를 가진 듯한 어느 영화평론가는 풍경에 이끌린 오늘날의 영상 작업의 추이를 헤아리며 이렇게 말한다. "자연 과정의 경이, 인간과 비인간적인 생명 사이의 교차, 인간, 국가, 그리고 대지라는 근심 어린 삼각측량법, 무엇으로 이어지든, 풍경은 개인을 초과하는 범위에 놓인 이미지를 사유하고 제작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몰두의 뿌리를 풍경화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영상 이미지는 현실에 속박되어 있어 회화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흔적들을 등록한다. 왜 풍경일까. 이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세계이며 그 속에서 혼자이지 않기 때문이다."(Erika Balsom, "Why Are Artist Filmmakers Turning to Landsacpe?")

 

 

흐름과 보임: '너머' 없는 세계의 풍경과 에세이 영화 / 유운성

p. 30

생각을 멈추고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무대로 돌아와 보면, 이 공연을 이루는 안무 동작들은 <지중해>의 풍경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념들과도 관계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동작들의 배치를 통해 어떤 틈도 만들지 않는 순수한 가시성 자체처럼 보인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저 보일 뿐 그 무엇도 보이게 만들지 않는 춤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에서 주장하기를, 아무것도 형상화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몸(짓)으로서의 춤, 사유 자체 외의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유의 은유"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유의 모든 치장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순수한 소멸(consumation)"이기도 한 춤이라고 한 것보다도 멀리, 아마도 지나치게 멀리 나간 것이리라. 

 

 p. 31

문득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의 춤은 풍경으로서의 춤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기스버트가 말하고 있는 추상이란 사실 풍경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즉,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으로서의 춤이다. 그러니까 엘 콘데 데 토레필의 공연을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저항의? 역사의? 아니면 사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무엇이건 모든 가능성들을 삼켜 버리는 풍경의 힘을 목격하게끔 하려 든다. 그런데 모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심미화된 경관으로서의 풍경이란 것을 어떻게 무대 위로 옮겨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풍경으로서의 춤을 통해서다.

 

p. 34

하나의 풍경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자명하기 이를 데 없다. 가시성이 극도로 강화된 풍경은 여기와 저기,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고 하는 교환의 토대가 되는 시간적・공간적 대립항들의 한쪽을 억누르면서 여기-현재, 여기-과거, 저기-현재, 저기-과거 가운데 하나에 고착된 기만적인 구성물을 산출해낸다. 영화적 에세이스트들은 이처럼 가시성으로만 환원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 옆에 시간적 곤간적으로 이질적인 풍경을 병치하거나 아니면 아예 풍경이 아닌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풍경의 가시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님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풍경이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비가시적 힘에 대한 사유로, 풍경의 이면이나 너머에서가 아니라 풍경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에 대한 사유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러한 논증의 과정이 없는 풍경영화는 영화적 에세이와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pp. 38-39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자문하기보다는, 재개발 구역이나 도심의 낙후된 지역 등 공동체를 무너뜨리면서 출현한 풍경에 감정적으로 탐닉하는 풍경 에세이들 말이다. 많은 경우 이렇나 풍경 에세이들은 풍경의 가공할 가시성에 저항하는 반()풍경적 장치로서의 말이 아닌 감정적으로 물든 추억, 회고, 우수의 말들로 풍경을 다시 부정적으로 여성화하곤 한다. 이는 영화적 에세이를 하나의 방법이 아닌 형석이나 스타일로 취한 결과다. 

 

 

역사를 위한 아토피아: <우로보로스>의 풍경 / 이한범

p. 43

여기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영화적 공간으로서의 풍경이 자율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역사가 사실 혹은 정보들에 의해 구성될 때, 즉 언어적으로 구성될 때 그 공간은 결국 특정한 정체성으로 환원되며, 영화의 주체가 추동하는 역사라는 시간성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풍경은 그것의 관계적 기능은 제거된 채 지표성만이 강화되어 역사가 상정하는 장소로 닫힌다. 이 서사는 언어로 진술되는 연속체의 역사, 시간의 축적을 전제한 역사이다. 이 역사의 모델은 재현의 체계에 속해 있는 것이며, 미학적 충격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의 방법론은 아니다. 한 장소의 시간성이 고유화되면 고유화될수록,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가 서술될수록, 그 장소는 외부와 더욱더 단절되고 고립된다. 

 

 


 

*파리에 있을 시절, 재밋게 보았던 Pauline Julier 전시에 대한 글이 번역되어 있었다.

방학때 좀 그때 봤던 전시를 정리해야 될텐데....

 

*Erika Balsom, "Why Are Artist Filmmakers Turning to Landscape," Frize

_________________, "The Reality-Based Community," e-flux Journal #83, 2017

*Travor Paglen, "Experimental Geography: From Cultural Production to the Production of Sp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