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롤랑 바르트, 김웅권 역, 2006, 동문사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Roland Barthes, 1980
5. 사진찍히는 자
pp.26-27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거울에서와는 다르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그 행위는 최근의 일이다....내가 원하는 것은 시선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도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 의식의 교활한 분열인 것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분신의 환영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기 환시Héauteoscopie를 자각적 환각증과 접근시킨다. 이 자기 환시는 여러 세기 동안 커다란 신화적 주제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마치 우리가 사진의 심층적인 광기를 억압하는 것 같은 형국이다. 그것은 내가 인화지 위의 '나'를 바라볼 때 나를 사로잡는 그 가벼운 불편을 통해서만 그것의 신화적 유산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p.29
사실 사람들이 찍은 내 사진에서 내가 노리는 것(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의도')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 사진의 에이도스ëidos:본질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나의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견뎌내고 좋아하며 나에게 친숙한 유일한 것은 사진기 소리이다. 나에게 사진작가의 기관은 그의 눈이 아니라(시선은 나를 질겁하게 한다)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카메라 렌즈의 셔터 소리에 연결되어 있고, (사진기가 아직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면) 금속성을 내는 건판의 미끄러짐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런 금속성 소리를 거의 관능적으로 좋아한다. 마치 사진에서 이 소리가 내 욕망이 매달리는 바로 그것-유일한 그것-인 것처럼 말이다. 그 짧은 셔터 소리는 죽음의 노출 시간대를 깨버리는 것이다.
11.스투디움
p.43
스투디움은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다양한 관심, 일관성 없는 취미의 매우 방대한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쯤의 욕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광경들,옷들,책들에 대해 느끼는 동일한 종류의 막연하고 잔잔하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15.의미하기
p.55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16.욕망을 불어넣기
p.57
나에게 (도시든 시골이든) 풍경사진은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거주 욕망은 내가 그것을 내 안에서 잘 관찰할 수 있다 할지라도, 몽상적이지도(나는 괴장한 장소를 꿈꾸지 않는다) 경험적이짇도 않다(나는 부동산 광고의 선전에 따라 집을 사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일종의 투시력, 다시 말해 나를 미래의 유토피아적 시간으로 인도하거나, 아니면 내 자신의 과거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는 것 같은 그런 투시력에 속한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와 <전생>에서 노래했던 이중의 운동이다. 이처럼 특별히 좋아하는 풍경 앞에서 모든 것은 마치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거나 아니면 그곳에 가야 하는 게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이미 그 안에 존재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 따라서 (욕망이 선택한) 풍경의 본질은 내 안에서 (전혀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머니를 남몰래Heimlich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리라.
22.사후에 그리고 침묵
p.70
요컨대 스투디움은 언제나 코드화되어 있고, 푼크툼은 그렇지 않다(나는 이 용어들을 남용하지 않고 싶다)
23.가려진 시야
p.76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가려진 시야의 현존(역동적 힘)은 에로틱한 사진을 포르노 사진과 구분시켜 주는 것이다. 포르노는 보통 성기를 나타내며, 그것을 벽감에서 나오지 않는 신처럼 모셔진 부동의 대상(물신)으로 만든다. 내가 볼 때 포르노적 이미지에는 푼크툼이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나를 즐겁게 할 뿐이다(뿐만 아니라 곧바로 실증이 난다). 그 반대로 에로틱한 사진은 성기를 중심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이것은 에로틱한 사진의 조건 자체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성기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을 그거의 틀 밖으로 끌고 간다. 이 점 때문에 나는 그 것을 좋아하고 그것은 나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따라서 푼크툼은 시야 밖의 미묘한 영역 같은 것이다.
27.알아보기
p.86
나는 수많은 다른 여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을 테지만 어머니를 '되찾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를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다르게 알아보았다. 따라서 사진은 나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작업을 강요했다. 나는 어머니의 동일성이 지닌 본질을 향한 채, 부분적으로 진실인, 따라서 완전히 가짜인 이미지들 가운데서 발버둥쳤다. 어떤 사진 앞에서 "거의 어머니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사진 앞에서 "어머니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거의라는 말은 사랑의 끔찍한 체제 뿐 아니라 꿈의 실망스러운 위상을 나타낸다.
30.아리아드네
p.94
사진의 본질 같은 무언가가 그 특별한 사진 속에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 확실하게 존재했던 그 유일한 사진에서 사진의 고유성('본질')을 '끌어내어' 그것을 나의 마지막 탐구의 안내로 삼기로 결심했다. 세계의 모든 사진들은 하나의 고유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이 미로 한가운데에서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실현시키는 이 유일한 사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로적 인간은 결코 진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아리아드네만을 추구한다." 온실 사진은 나의 아리아드네였다.
33.포즈
p.100
나는 현재의 사진이 드러내는 부동성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 포착으로 이동시키는데, 포즈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그 정지이다. 이러한 측면은 사진의 노에마가 사진이 살아 움직여 영화가 될 때 변절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사진에서는 무언가가 작은 구멍 앞에 포즈를 취했고 그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이것이 바로 나의 감정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무언가가 그 동일한 작은 구멍 앞으로 지나갔다. 포즈는 이미지의 계속되는 연속에 의해 휩쓸려가고 부정된다.
p.101
...(허구적) 영화는 배우로서 '그것이-존재-했음'과 역할로서 '그것이-존재-했음'이라는 두 개의 포즈를 뒤섞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배우들을 어떤 영화에서 보거나 다시 볼 때 우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회화 앞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우울함은 사진의 우울함 그 자체이다(나는 죽은 가수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와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36.인증
pp.107-108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반드시)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을 다만 확실하게 말한다....어느 날 나느 어떤 사진작가로부터 나의 사진 한장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어디서 촬영되었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넥타이를 매고 스웨터를 입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했지만 허사 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한 장의 사진이었기 때문에 나는 (설령 내가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 하더라도) 그곳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pp.108-109
어떠한 글도 그 확신을 나에게 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인증할 수 없다는 것은 언어의 불행이다(또한 언어의 관능성이라 할 것이다). 필시 언어의 노에마는 이러한 무력감일 것이다. 혹은 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언어는 본성상 허구적이다. 언어를 비허구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측정 장치가 필요하다. 논리가 소환되고, 그게 안 되면 선서가 동원된다. 그러나 사진은 어떠한 중계와도 무관하다. 그것은 꾸며내지 않는다. 그것은 인증 자체이다. 그것이 허용하는 드물지만 인위적 기교들은 입증을 하지 못한다. 그 반대로 그것들은 속임수이다. 사진은 그것이 속임수를 쓸 때에만 고심한 흔적을 드러낸다. 그것은 거꾸로 된 예언이다. 카산드라처럼 말이다....모든 사진은 현존의 증명서다.
p.111
내가 보기에 사진이 이미지에 대한 통상적 논의를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인류학적으로 새로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 해설가들(사회학자들과 기호학자들)에게서 유행하는 것은 의미론적 상대성이다.... 피지스(Physis: 자연,존재자들 전체)는 없고 테지스(Thésis: 관습, 인위적인것)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사진은 세계의 유동대리물analogon이 아니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제조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의 렌즈는 알베르티의 (전적으로 역사적인) 원근법에 따르고, 음화 위에 각인은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초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사진이 유비적이라는 사실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의 노에마는 전혀 유비 속에 있지 않다(이것은 사진이 온갖 종류의 재현들과 공유하는 특징이다).
37.정지
p.112
사르트에 따르면, 모든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소설 읽기에 이미지들의 빈곤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내가 소설에 확실하게 사로잡혀 있다 해도, 정신적 이미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의 빈곤한 이미지에 사진의 꽉 찬 이미지가 응대한다.
p.114
사진에서 시간의 부동화는 과도하고 괴물 같은 방식으로만 제시된다. 시간은 출구가 꽉 막혀 있다(이로부터 숲속의 잠자는 미녀의 수면 상태를 신화적 원형으로 하는 활인화와의 관계가 비록된다). 사진이 더없이 예민한 우리의 일상과 관련되고 '현대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한 것은 사진 안에 비현대적인(비시사적인) 수수께끼 같은 지점, 이상한 정지, 정치의 본질 자체 같은 게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본질상 추억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추억의 문법적 표현은 완료형이 되는데 반해 사진의 시간은 다분히, 시점이 정해지지 않은 과거가 될 것이다), 이 추억을 차단하며 신속하게 대항 추억contre-souvenir이 된다.
38.밋밋한 죽음
p.116
사진과 더불어 우리는 밋밋한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났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경멸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 밋밋하게 이야기하는군요"-마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의 밋밋함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공포는 이런 것이다. 즉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말할 게 아무것도 없고, 내가 결코 심화시키지도 변모시킬 수도 없는 채 응시하는 그의 사진에 대해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사유'는 저 최초의 죽음 끝에 나의 죽음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두 죽음 사이에는 기다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말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그 아이러니 이외에 다른 방책이 없다.
40.사적/공적
p.123
(보통 아마추어는 예술가의 미성숙으로 규정된다. 그는 어떤 직업의 숙달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혹은 오르고 싶지 않은-사람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진에서 전문가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마추어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사진의 노에마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44.밝은 방
p.131
사진은 모든 의미에서 평평하다는 사실, 이것이 내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진의 기술적인 기원 때문에 그것을 어두운 통로(암실/어두운방: camera obscura)의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다. 우리는 밝은방camera lucida을 언급해야한다(그것은 사진보다 앞서는 그 장치, 한 눈은 모델에, 다른 한 눈은 종이에 고정시킨 채 프리즘을 통해 대상을 그릴 수 있게 한 그 장치의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시선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의 본질은 내밀함 없이 전적으로 바깥에 있으나 내면의 사유보다 더 접근할 수 없고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의미는 없지만 가능한 모든 의미의 깊이를 부른다.
45.'분위기'
p.116
얼굴의 분위기는 분해 불가능하다(내가 분해할 수 있자마자, 나는 입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요컨대 나는 의심하고 본성상 완전한 명백성을 나타내는 사진으로부터 일탈한다. 명백함은 분해되기를 원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분위기는 실루엣과 달리 도식적.지적 여건이 아니다. 분위기는 또한 '닮은'과는 달리 단순한 유사-이 유사가 고도하다 할지라도-도 아니다. 아니다, 분위기는 육체에서 영혼-어떤 사람의 경우는 좋고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나쁜 작은 개인적 영혼, 곧 아니물라animula-으로 이끄는 잉여적인 그 무엇이다.
48.길들여진 사진(마지막이다!)
p.146
사진의 광경을 완벽한 환상들의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진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완강한 현실의 깨어남과 대결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해제
p.156
...사진을 "나는 좋아한다I like/나는 사랑한다I love"와 같은 정서의 차원에서 검토한다. 그러니까 그는 사진이 어떻게 감정을 폭발시키는지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이로부터 나온 두 개의 개념이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다. 전자가 '나는 좋아한다'와 연결된다면, 후자는 '나는 사랑한다'와 연결되면서 둘은 강밀도와 질적 차이를 나타낸다.
*감성적 에세이를 관통하는 분석들.
사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그의 손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변하는게 흥미롭.
비유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어서, 그만큼 후속 연구가 많은 것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