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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바지 / 장애의 화가들, 사뮈엘 베케트, 김예령 역, 2001, 워크룸 프레스

세계와 바지 / 장애의 화가들, 사뮈엘 베케트, 김예령 역, 2001, 워크룸 프레스

 

 

 

 

p. 20

이상이 사람들이 애호가에게 늘어놓는 말들의 아주 작은 이룹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회화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림들이 있을 뿐이지요. 그림들이란 소시지가 아닌 이상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런 게 전부일겁니다. 즉, 그림들이랑 다소간의 상실을 통해, 또 이미지를 향하려는 다소간의 터무니없고 신비스로운 추동을 통해, 저희들이 많게든 적게든 모호한 내적 긴장들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는 것, 그 부합 정도를 몸소 판정하는 일은 당신 자신이 문제 삼을 바가 아닌데, 그 이유는 당신은 결코 그 긴장을 겪는 자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장차 당신이 하나의 그림에 대해서 알게 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그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게 전부입니다.

 

p. 23

순전히 시각에 호소하는 지각을 글로 표현하는 행위, 이는 의미가 제거된 문장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p. 29

그러나 판 펠더 형제는 형 아우 할 것 없이 출구 없는 조형적 상황을 조형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이유인즉, 그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가 결국은 회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자.

이렇듯 그들이 변화를 재현할 것을 포기한다면, 그럴 때 재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 이외에, 과연 스스로를 재현하도록 허용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걸까?

그들 중 하나에게는 작용을 겪는바, 즉 변화된 사항이 남겨진다. 다른 하나에게는 작용을 가하는바, 즉 변하게 하는 사항이 남는다. 

한편으로는 사형 집행인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물에 대한 초연을 통해 마침내 재현 가능한 것이 되는 이 두 사물, 그것들이 창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남는다. 즉, 그것들이 아직 사물들인 건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일은 도래하리라. 실제로.

 

p. 33

남 보이기에 어엿한 존재자를 원하는가? 그에게 푸른 작업복을 입혀라. 그에게 호루라기를 주어라.

공간이 당신 흥미를 끄는가? 그것을 무너뜨리자.

시간이 당신을 괴롭히는가? 다 함께 그것을 죽여버리자.

미(美)? 그러모아 기워 붙인 인간.

선의? 질식시키기.

진리? 가장 많은 횟수의 방귀.

이런 아수라장에서 이 고독한 회화는, 제 머리를 가리는 고독, 두 팔을 내미는 고독으로 인해 홀로 있는 이 회화는 과연 어찌될 것인가.

그 가장 작은 부분조차도 희생양의 행복을 기원하는 인류의 예배 행렬 전체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진정한 휴머니티를 품고 있는 이 회화.

가정컨대 아마도 그것은 돌에 맞아 죽게 되리라.

생의 영구한 조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드는 비용이 있다. 

그것들을 따로 구분하는 제에게 불행 있으라.

어쨌거나 사람들은 야유의 함성을 지르는 정도로 만족할는지도 모른다.

찌 되는 간에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판 펠더 형제에 관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건 이것이 겨우 시작이니까.

나는 그 시리즈의 처음을 연다.

영광이다.

 

 

 

장애의 화가들

p. 51

회화의 역사는 그것이 제 대상과 맺는 관계들의 역사로, 그 관계들은 필연적으로 우선은 폭의 측면에서, 그다음에는 침투의 측면에서 변화를 겪는다. 우선은 그릴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질 때,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것들을 그리는 하나의 방식이 점점 더 점유적인 경향을 띨 때 회화는 갱신된다. 이는 첫 번째 양상을 순전히 만개로,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양상을 순전히 집중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두 태도가 마치 휴식이 노고에 연관되듯 서로 묶여 있다는 뜻이다.

 

p. 53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현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대상을 볼 수 없다. 대상은 그저 그것 자체일 뿐이니까.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현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대상을 볼 수 없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니까.

이 두 종류의 예술가들, 또는 대상-장애(empêchement-objet)와 시선-장애(empêchement-œil)라는 두 종류의 장애는 항상 존재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장애를, 사람들은 셈에 넣어왔다. 그에 대한 조절이 가해져왔다. 그럼으로써 이들 장애의 문제는 재현의 범위로 귀속되지 않았다. 혹은 거의 귀속되지 않았다. 반면, 판 펠더 형제에게서 이 장애들은 재현의 일부이다. 심지어 그들에게선 그것들이야말로 재현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되리라. 그리는 행위를 저애하는 어떤 것, 바로 그것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 Le Monde Et Le Pantalon / Peintres De L'Empechement

 

- 헤르 판 펠더 Geer van Velde, 아뜰리에 Atelier, 1947-8

 

- 브람 판 벨더 Bram van Velder, 무제 Sans titre, 19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