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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양귀자, 2017(1998), 도서출판 쓰다

✨모순, 양귀자, 2017(1998), 도서출판 쓰다

 

 

 

 

1. 생의 외침

p. 11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넘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p. 15

그리고 뒤에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pp. 16-17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3. 사람이 있는 풍경

p. 64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 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5.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

p. 106

"사진은 그렇게 잘 찍으면서 다른 일은 왜 그게 안 되지요? 인생의 모든 기회가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훌륭한 순간 포착, 거기에 진짜 인생이 존재한다....."

그러면 김장우는 이렇게 변명했다.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수는 없어.

 

 

6. 오래전, 그 십 분의 의미

p. 127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7. 불행의 과장법

pp. 152-153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p. 164

그는 나의 확답을 기다리고 있다. 대답이 아니라 확답이었다. 확답만 떨어지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완벽하고 치밀하게 결혼작전에 돌입할 기세였다.

 

 

8. 착한 주리

p. 173

그렇지만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9.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p. 188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나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이러이러한 일로 지금 죄수복을 입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줄 수 있었다면 김장우의 아픔은 훨씬 가벼워졌을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p. 192

우리가 얻은 방은 다행히도 온돌방이었다. 김장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침대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줄 그 많은 이미지들을 어찌 감당할는지 나는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을 이끌어버렸을 때 그 자괴감을 어찌 견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 육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것이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다. 

 

pp. 194-195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pp. 236-237

그는 내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은 아버지와 남동생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밖에 없는 형에 대해서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듯이 나도 그에게 그렇게 해주길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의 기대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김장우에게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 것이다. 서로 사랑하므로 결혼한다면, 결혼으로 서로의 사랑이 물처럼 싱거워진다면.

 

 

16. 편지 

p. 286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줘.....

수정할 것은,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17. 모순

p. 296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과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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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연애와 결혼이 남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고, 그렇기에 마음을 후비는 문장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