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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포르노그래피, 알랭 바디우, 강현주 역, 김상운 감수, 2015, 북노마드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알랭 바디우, 강현주 역, 김상운 감수, 2015, 북노마드

Poronographie du temps prèsent, Alain Badiou, 2013

 

 

 

 

현재의 이미지

pp. 15-18

자크 라캉은 주네의 희곡을 길게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자기 이론의 대부분을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 끌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라캉은 실재계le réel를 재현[표상]으로, 욕망을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연극이 이를 위한 중요한 보고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체들을 그들 자신의 창조적 능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권력에 주체들이 동의하라고 상상적 수법에 의해 강요하는 것이 연극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라캉은 형식적 외양을 강조합니다. 라캉은 발코니가 한 편의 희극임을 파악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희극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희극은 하나의 효과에 대한 관계를 가정하고 수용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남근phallus이라고 불리는 이 기의의 출현 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출현'입니다. 비극은 운명에 대한 장엄한 우울mélancolie입니다. 비극은 진리가 과거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희극은 언제나 현재의 희극입니다. 왜냐하면 희극은 남글을, 다시 말해 이 현재의 본래적 상징을 출현시키기 때문입니다. 오직 연극만이 현재 존재하는 권력을 희극적으로 출현시키며, 그 결과 조롱을 이끌어냅니다. 모든 비극은 권력의 음울한 우울을 보게 합니다. 반면 모든 희극은 사실상 현존하는 권력을 익살극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목적은 현재에 대한 철학적 희극의 등록부registre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지'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미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내 목적은] 우리의 현재에 대한 거울상적spéculatif 남근을 명명하는 것입니다. 

     희극의 힘은 성대한 상징물 아래서, 벌거벗은 권력이 그 난폭성도 공백vide도 영원히 숨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현재, 즉 우리의 현재에 대한 철학적 희극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권력의 성대한 상징물은 무엇일까요? 건드릴 수 없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이런 가치가 현재를 불행하게 현전시키는 것일까요?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이름은 '민주주의'입니다.

 

 

pp. 19-21

발코니는 이미지들의 군림과 반란의 실재계를 서로 대면하게 합니다. 연극은 이미지들의 질서로서의 질서라는 형상에서, 즉 유곽에서 시작됩니다. 유곽은 엄격하게 질서 잡혀 있는 것의 모범적 형상입니다. 이르마라는 등장인물이 유곽을 무자비하게 지휘하고 있습니다. 유곽은 이르마의 법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상상계에 의해 전적으로 규제됩니다. 오늘날에서야 우리가 완전하게 볼 수 있는 것을, 주네는 이미 1950년대에 봤습니다. 외설적인 이미지들의 증식은 권력의 감춰진 잔혹성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이 증식은 문화적인 층위와 정치적인 층위로 이루어져 있는 모든 층위에서, 어쩌면 욕망에 대한 세련된 선동과 상업광고의 조잡함 사이의 융합입니다. 유곽은 이런 융합이 일어나는 연극적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복장을 하고 분장을 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제시되는 것은 즉시 돈으로 환산될 수 있습니다. 유곽은 욕망의 평균가격이 매겨지고 정해지는 장소입니다. 이미지들의 시장인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유곽 바깥에서는 노동자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입니다. 마치 오늘날 서구라는 유곽의 바깥에서 아주 자주 일어날 조짐이 보이는 것과도 같은 것 말입니다. 즉,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 노동자들이나 중국 노동자들의 수천 개의 반란, 아니 지금 막 생겨나고 있는 아랍의 봄이 특히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경우에는 대도시의 변두리에 내던져진 젊은이들이나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내몰려 있는 쉼터에서도 그러합니다. 

     유곽의 바깥은 실재의 형상을, 삶의 형상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분노에 접근하는 통로로서든, 무한한 참을성으로서든, 순수 현재입니다.

 

pp. 24-25

요컨대, 모든 문제는 이미지에 대한 실재의 관계, 즉 희곡에서는 유곽에 대한 봉기의 관계가 극적으로 모순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지에 의해 포획되자마자, 환영이 빚어낸 욕망에 대한 향수에 붙들리자마자 실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는 순수 현재에 대한 살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희곡에서 이러한 살인을 꾀하는 자는 바로 경찰서장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의 경우에 현재 시간의 이미지들을 파악해보려는 시도는 대체로 이미지가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결과는 초래합니다 .현재의 현재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하고, 상상하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p. 39

주네의 테제는 분명히 여기에 있습니다. 즉, 한 순간의 이미지는 회귀로서만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거짓이지 않은 형상인 극장에서의 재현의 회귀 말입니다(주네는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게 여기보다 더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유일한 영원성은 순환성입니다. 욕망은 역량의 재개에 불과하지만, 역량은 스스로를 이미지로서 나타냅니다. 

 

p. 40

권력에서 권력으로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중심 문제는 이미지와의 연쇄를 일소해버리는 것이며, 이렇게 하려면 [성적으로] 가장 은밀한 확신을 가진 경찰서장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각주:1]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동의하게 되는 주관적 동력은 무엇일까요?

     혁명의 이념이 부재하게 된 이후로, 우리의 세계는 시장민주주의라는 합리적이고 외설적인 이미지 아래서의 역량의 재개에 불과합니다.

 

pp. 46-48

플라톤의 동굴에서, 즉 이미지들이 군림하는 민주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현재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래된 혁명 정치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가 힘겹게 그 진리를 경험하고 있는 시간들입니다. 우리는 이 간격의 경험자들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한 세계는 서서히 망각 속으로 바져들고 있고, 다른 세계는 단편적일 뿐입니다. 이곳을 거쳐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거쳐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물신 없는, 특히 민주주의적 물신이 없는 하나의 정치를 단편들에 의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발코니에서 반란자 중 한 명이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유, 인민, 덕vertu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사람들이 이것들을 칭송한다면 어떻게 이것들을 사랑할 것인가! 만일 사람들이 이것들을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그 생생한 현실 속에 그냥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와 이미지를 준비한다면, 그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나 늘 조금밖에는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예속된 욕망을 전혀 채워주지 않는 이 시와 이 이미지를 준비합시다. 현재에 대한 시적인 벌거벗음을 준비합시다.

 

 

 

 

 

부록 적기와 삼색기 Le Rouge et Tricolore  |  김상운 역 [각주:2]
1. 배경: 세계의 상황

p. 56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눈을 기만하는 일종의 역사극이 만들어졌다. 지배적이고 문명화된 자본주의의 고향인 '서구'와 피비린내 나는 테러리즘을 지시대상으로 하는 '이슬람주의'라는 일반적인 짜임새 아래서, 한편으로는 어떤 신의 시체에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협박을 일삼는 살의로 가득 찬 무장한 무리나 과잉 무장한 개인들이 등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야만적인 다국적군이 등장한다. 

 

2. 프랑스의 특유함: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공화국'
3. 뭐가 일어났는가   1) 파시스트 유형의 범죄

 

4. 뭐가 일어났는가   2) 국가와 여론

p. 75

....시위는 삼색기를 대량으로 사용해 이와는 정반대의 것을 주장했다. 프랑스인이라는 것은, 우선 국가의 지휘 아래에서 똑같은 의견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이다. 사태가 벌어진 처음 며칠 동안, 이 사태에 대해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pp. 77-78

프랑스에서는 오랫동안 두 종류의 시위가 있었다. 적기를 내건 시위와 삼색기를 내건 시위가 그것이다. 정체성에 집착하는 살인자 파시스트의 소규모 무리들(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종파주의적 형태를 내세우는 무리이든, 프랑스의 국민적 정체성이나 서양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무리이든)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줄이고 싶어하더라도, 우리네 주인들이 명령하고 사용하는 삼색기는 전혀 효력이 없다. 되찾아야 할 것은 이와는 다른 것, 즉 적기이다. 

 

 

 

 

알랭 바디우에 대하여, 윤동희 

pp. 90-91

오늘날의 바디우를 있게 한 '사건'이란 거대하고 불확정적인 변동이다. 사건은 곧 인간 현실의 원천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사건은 정치, 사랑, 예술, 과학이라는 이 네 개의 네트워크가 얽히고설킨 것이다. 진리로 향하는 네 개의 길이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pp. 94-95

바디우가 인용한 게오르크 칸토어의 집합론은 기본적으로 공집합empty set의 존재를 의미하는 다양성의 이론 중 하나이다. 바이두에 따르면, 수, 함수, 점, 산술적 관계는 모두 집합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집합과 원소로 이루어졌고, 그것들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것을 반복한다. 따라서 수학만이 무한과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의 기본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바디우의 수학적 방법론은 무한히 해체될 수 있는 다양성은 비움에 이르게 된다는 것, 즉 다양성은 비움으로 이우러져 있음을 깨우쳐주었다. 

 

pp. 100-101 

실재는 절대적으로 수학적이라는 것,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 그런데 그 '사건'이 결정되고 조직화된 체계 혹은 상황situation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체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어떤 빈 공간이 드러나는 놀라운 순간이 바로 사건이라는 생각. 바디우 유물론의 독창성은 여기에 있다.

     바디우에게 체계와 사건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체계는 사건을 억압한다. 혁명의 전야에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듯 아무렇지 않아 보이다가(체계), 동이 틀 무렵 갑자기 체계까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밀려오는(새로운 상황) 것을 상상해보라. 체계가 보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며, 갑자기 발생한 일이겠지만, 실은 오랫동안 혁명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이다. 사건은 켤코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 아래 깊숙한 곳에서 잠복해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바디우는 '충실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충실성이란 우리가 사건의 파괴적 결과들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정한 것을 말한다. 인간은 사건을 생각하고 자신들이 그로 인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이 바로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p. 104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둘이 만나 하나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둘의 변화가 진행되는 "최소한의 코뮤니즘"으로 귀결된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타자와 더불어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게 되는 흔치 않은 체험이다. 

 

p. 105

사랑,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   

(소제목이다)

 

 

 


 

-이 책은 2013년 1월 26일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각주:3]가 소르본의 대강당에서 개최한 [철학 포럼]에서 알랭 바디우가 '현재의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 전부를 옮긴 것이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26. 황제와 갈릴리인, 인형의 집

 

 

 

 

 

  1.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옮겨질 수 있다. "이렇게하라면 자신의 성기가 가장 크다고 확신하는 경찰서장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옮긴이) [본문으로]
  2. 글은 뉴스사이트 《미디어파르Mediapart》의 블로그에 수록된 「적기와 삼색기Le Rouge et Tricolore」를 저본으로 삼은 완역본이다. 글의 축약본이 2015 1 27일자 《르몽드》에 실렸다. [본문으로]
  3. 프랑스 라디오 채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