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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김광현, 2001, 공간서가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김광현, 2001, 공간서가

 

 

 

 

p.9

건축을 하는 사람, 건축을 배우는 사람, 건축을 생활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이 있다. 이를 '공통감각'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축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가치와 본질이 있다. 건축물의 모양이 어떠하며 어디에 어떻게 지어졌는가 하는 조건을 넘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돌과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거친 물질 속에 배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런 물질과 공간이 결합한 결과물 위에서 사람은 자신의 소중한 삶을 영위해 간다는 사실이 있다. 이를 이 책에서는 '공동성'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p. 27

...공동성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건축만이 지니는 단독성singularity을 얻기 위함이다. 어떤 건축물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 인간이라고 하면 추상적으로만 들리던 것이, '이 사람'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구체적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듯이, 단독성이란 사람 일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음을 뜻할 때, 이를 단독성이라고 한다. 공동성은 어떤 건물에 단독성을 주는 근거다. 

 

p. 52

(칸)그는 세상을 떠나기 한 반년 전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강연하며....."어느 날, 저는 무언가를 찾아냈습니다"......"저는 이렇게 믿어요. 한 인간이 지니는 가장 커다란 가치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줄 아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정말 소중합니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것입니다...

 

p. 58

근대건축의 선구자들은 건축과 도시를 통해 사회 정책의 입안자요, 오피니언 리더로서 자처해 왔다. 그러나 근대 공업 기술의 분업화와 전문화에 따라 이러한 전능의 건축가상은 붕괴되고, 형태만을 조작할 따름인 탈이데올로기적 디자이너로 변모하였다. 이에 대해 칸은 '평면이란 방들의 사회The plan is a society of rooms'라고 말한다. 

 

p. 71

폐허가 된 돌을 밟는 일은 폐허가 되기 이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p. 105

건축을 짓는 일은 인간의 공동성을 불러 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펜은 이 박물관을 통하여 건축이란 무릇 '익명적'임을 말하였다. 건축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다. 건축은 '발견'될 때 비로소 존재한다. 좋은 건축은 창안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건축은 이미 누군가 함께 가지고 있는 바를 함께 가지게 해 주는 것이다. 

 

p. 117

땅에 구속되는 '공동체'라는 관념은 오늘의 대도시에서는 현실과 무관한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느다. 그런데도 이러한 공동체 관념은 여전히 도시를 만드는 공리처럼 작용하고 있다. 

 

p. 170

...건축물의 재생이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이어받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래된 나무는 속이 썩고 겉만 남지만, 새로운 아주 작은 나무가 비어 있던 곳 안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새로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는 오래된 나무의 겉을 기억하거나 그것과 대화하기 위해 자라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된 나무의 기억과는 별 상관이 없이 뿌리를 새로 내리기 시작한다. 고쳐진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을 보며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은 재생이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닌, 건축하는 목적의 근본이 새로 자라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건축에서 재생은 모든 건축이 그러한 것처럼 건축의 근본을 묻는 작업이다. 

 

p. 206    '인문학적 건축'을 의심한다. 

'인문학적 건축' 따위는 성립되지 않는 말이니 이런 말은 쓰지 않기를 바란다.....이 말을 유행처럼 계속 쓰면 그렇지 않아도 건축이라는 말이 약해지고 있는데, 이 '인문학적 건축'으로 그냥 '건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는 일을 잘하고, 하는 일을 건축으로 다부지게 잘 설명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이 이름으로 이미 책을 내셨거나 강의를 하시는 분에게는 죄송!)

 

pp. 210-211   건축하는 이들이 피해야 할 말, '비움'과 '침묵'과 '미학'

잘 생각해 보라. 어떤 건축물도 잘 생기건 못 생기건 본래 비어 있는 것이다. 그릇이 비어 있듯이 모든 건축물의 방은 다 비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물건과 함께 산다. 그러니 비움은 건축의 특별한 조건도 아니다. 꽉 차 보이는 건축도 다 나름대로 비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 건축이 말하는 비움은 그런 비움이 아니다. 이 비움은 결벽증의 비움이고 엘리트적인 우월감을 담는 비움이며, 사는 사람은 말한 적이 없는 건축가만의 비움이다. 일상의 삶과는 무관하고 단 한 번의 연출된 건축사진에만 남아 있는 거북한 비움이다. 

 

p. 234

건축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장식'에 관한 것이다. 장식이라고 하면 으레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고대 신전에 있던 장식 중에서 식물로 된 것은 식물을 없앤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다시 말해 건축에 나타난 식물 장식은 인간이 집을 짓겠다고 자연을 훼손하고 건물을 세운 것이 미안하여, 그 대신 식물을 인공적으로 건축이 입힌 것이다.

 

p. 250

르 코르뷔지에는 이러한 모습을 '만곡의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사행이 격해지면 이윽고 사행의 변곡점이 서로 접촉되면서 다시 본래의 직선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한편으로는 기하학적 정신에서 이탈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새로운 정신의 투영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상파울루나 알지에 계획에서는 그 위에 자동차 도로가 난 거대한 육교와 아파트의 지붕이 해안선을 따라 느긋하게 만곡되어 있으면서, 새로운 풍경의 시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 

 

p. 290   4.3 그룹을 곁에서 생각하며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두 해 전에 있었던 <이 시대, 우리의 건축>전 이후 14명의 의사는 모두가 서로 하나의 접점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건축전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지금에 와서도 각자의 방향은 그때보다는 더욱 벌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표면적으로는 사용하는 단어가 비슷하여 무언가 전체의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묘하게도 몇 개의 단어로서만 읽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전시회 이후에도 각자의 생각이 서로 조율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가고 있거나,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14명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달리 생각해 보면 같이 않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왜 하나의 그룹 속에서 공존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p. 293   4.3 그룹을 곁에서 생각하며

다시 말씀 드려서 어떻게 해서라도 묵으려 하지 말고, 반대로 다른 점들을 갈라 서로 확인하는 일이 있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것이 4.3 그룹의 공동의 이상이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되겠지요.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4.3 그룹을 표면적으로는 이념형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4.3 그룹 속에서 무언가의 공통의 이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남들이 이렇게 이해하는 데 대해 "우리는 그러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다."라고 답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우선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는 일을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p. 337   

그러나 프랑스 건축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건축은 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다."

 

p. 353

사람이 일을 만들지만 반대로 일이 사람을 만든다. 일을 싸게 하면 사람도 싸지고, 일을 비싸게 하면 사람도 비싼 대접을 받는다. 

 

p. 358

좋은 공공건축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한다'는 생각에서 지어진 건물이다. 

 

pp. 429-430

건축은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철학처럼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나 실천 영역이 아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철학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 있음을 말하는 학문들이다. 그러나 건축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에 근거하지 않는다. 사람은 수학처럼 살 수는 없고 물리학처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땅에 거주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건축은 다만 사람이 어떻게 거주하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인가에만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보고 배우며 중요하다고 듣는 장소, 물성, 지역성, 빛, 공동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authenticity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건축은 삶의 진정성으로 만들어지고 판단된다.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보편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내면과 자신이 밖으로 표출한 것 사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가 있는지, 그 사이에 어떤 괴리는 없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성이란 기원, 속성, 성실성, 의도에 대한 진실함이다. 어떤 회사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창립되어 이를 표방하고 있는 바를 고객에게 보여줄 때 이 회사는 진정성이 있는 회사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진정성이 있는 삶이란 나의 내면적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 실천하고 있는 소중한 삶을 말한다. 진정성이란 무언가를 나와 관련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빈자의 미학에 대한 분석을 꼼꼼하게 하셨다. 

건축인은 아니지만 멀찍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을 때 다소간 정치사회적인 맥락이 얽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꼼꼼히 분석을 해주셨다. 

 

*루이스 칸 <코르뷔지에 선생님, 제가 하는 일이 어떤지요>, 1972

마르틴 하이데거 <짓기, 거주하기, 사고하기>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 <중심의 상실>

위르바니즘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 - 기념비에 대한 이야기